[미리보는 새천년]인터넷시대의 영어제국주의

  • 입력 2000년 2월 23일 19시 12분


미국에서만 고가의 양장본으로 800만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 동화 ‘해리 포터’ 시리즈. 지난해 말 미국에서 이 동화의 번역문제를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발단은 이 시리즈의 미국어판을 낸 출판사가 영국어판 원문을 미국식 영어로 번역한 것. 제1권 제목 ‘해리 포터와 현자의 돌(Philosoper’s Stone)’이 ‘마법사의 돌(Socerer’s Stone)’로 둔갑했다. 출판사는 공립학교(Public School)라는 단어조차 양국에서 정반대 뜻으로 쓰이는데 어떻게 미국식으로 바꾸지 않을 수 있냐고 항변했지만 독자들은 “문화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처사”라고 비난했다.

그뿐 아니다. 이 책의 가장 열렬한 독자층인 초등학생 등 상당수 독자가 인터넷으로 직접 영국출판사에 책을 주문했던 것. 인터넷문화 연구가들은 때를 만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이 ‘전세계의 미국화’를 가져온다고들 하지만 오히려 인터넷이 있었기에 미국인들이 영국식 영어를 이해하려는 집단행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 아닌가.”

과연 인터넷은 ‘언어와 문화의 차이를 보호하는 다원주의 네트워크’인가, 아니면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 침탈’인가.

▲영어가 세계제패?

9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영어로 된 웹사이트는 전체의 78%. 특히 전자상거래의 보안서버와 연결되는 웹사이트만 따지면 그 비중은 91%에 이른다. 이에 더해 최근 21세기 구상으로 ‘영어 제2공용어 정책’을 선언한 이웃 일본의 행보는 ‘영어 없이 살 수 없는 세상’이라는 한국인들의 강박감을 더욱 부추긴다.

그러나 이 흐름이 영어, 그것도 미국식 영어의 세계제패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최근의 대세는 오히려 ‘인터넷시대의 영어 위기설’이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21세기 전반부가 끝나기 전에 영어는 지배적 지위를 상실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97년 영국문화협회가 주도한 ‘English 2000’ 프로젝트에서도 “인터넷의 영어사이트 점유율이 현재의 90%선에서 곧 40% 이하로 줄어들 것” “영어를 제2외국어로 쓰는 인구가 원어민보다 더 많아질 날이 머지 않았다” “21세기에 영어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늘겠지만 영어의 중요성은 약화된다”는 등의 위기의식이 넘쳐났다.

실제 현재 언어인구수로 볼 때 1위는 영어가 아니라 중국어다. 원어민과 제2외국어 사용자를 합쳐 10억명. 영어 인구는 힌디어 인구와 더불어 6억명으로 가늠된다. 이제 ‘인해전술’의 전장이 오프라인의 생활공간에서 사이버스페이스로 이동하고 있다. 관영 중국인터넷정보센터(CNNIC)가 집계한 99년말 중국의 인터넷 인구는 890만명. 2002년 말에는 6100만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비영어권 국가의 네티즌들이 가장 쉽게 또 자주 접근하는 사이트는 ‘야후콤’이나 ‘아마존콤’ 등 영어사이트가 아니라 yahoo.co.kr 등의 모국어 사이트다.

이 ‘인터넷 시대 영어의 위기’는 단지 머릿수 문제만이 아니다. 영문학자 김성곤교수(서울대)는 “오늘날 영어가 국제어가 돼가는 것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다름아닌 영미인들”이라고 말한다. “이메일로 주고받는 영어는 엄밀한 의미의 정통영어도 표준영어도 아니다. 사용자가 자국 언어식으로 써나가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나 관습이 뒤섞인 일종의 혼합언어”라는 것. 인터넷 서점 아마존도 미국에서 인기있는 일본만화를 ‘애니메이션’의 일본어식 표현인 ‘아니메(Anime)’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대해 미국 미시시피대학 리타 레일리교수(영문학)같은 이들은 ‘글로벌 잉글리시(Global English·키워드 참조)’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적극적 대응을 주장한다.

아시아권에서의 영어교육붐 등을 볼 때 의사소통도구로 영어를 배우려는 인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영어의 국적, 문화적 정체성은 크게 도전받게 될 전망이다.

▲바벨탑이전시대로

21세기 인류는 다시 한번 ‘바벨탑 이전의 단일 언어시대’를 꿈꾸고 있다. ‘세계어’를 만들려는 시도는 BC 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중단없이 계속됐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시도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20세기 전반부 에스페란토운동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시도들이 기존언어와 별개의 ‘단일한’ 언어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면 요즘의 시도는 각자의 언어는 그대로 두되 그것을 번역,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다원화’의 방향이다.

이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컴퓨터공학의 발전. 새로운 언어를 배울 필요 없이 컴퓨터가 번역하게 만드는 이 시스템은 기존의 어떤 세계어 시도보다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1990년대 ‘유니코드(Unicode)’의 출현은 이 새로운 번역시스템 구축에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록될만하다. 문자 하나를 저장하는데 8비트 정보를 사용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유니코드는 16비트를 사용한다.

덕분에 최고 6만5535종의 문자를 표현할 수 있어 한글이나 중국어 일본어 포르투갈어 아랍어 등 현존하는 주요언어를 모두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이 구축됐다. 전세계 모든 문자가 호혜적으로 ‘평등 교환(번역)’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

그러나 도전은 지금부터다. 컴퓨터를 통한 기계번역 프로그램의 수준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번역프로그램은 크게 ‘정보 취득용’과 ‘정보 제공용’으로 분류된다.

정보취득용은 알타비스타(altavista.com) 등 검색엔진의 인터넷번역, 정보제공용은 상품설명서를 예로 들 수 있다.

정보취득용의 경우 사용자가 다른 언어로 된 정보를 이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으로 품질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보제공용은 정교한 번역이 요구된다.

한국과학기술원 최기선교수(전산학과)는 “정보취득용 번역프로그램은 2005년이면 정착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다른나라 말로 번역되는 ‘완전자동번역기’의 도래 시기는 쉽게 예견하기 어려운 상태.

이미 구미 각국은 번역의 고도화를 위한 연구를 국가적 혹은 국제적 사업으로 추진중이다. 미국의 LDC(www.idc.upenn.edu), 유럽의 ELRA(www.icp.grenet.fr/ELRA/home.html) 등이 그 예.

한국도 빠지지 않는다. 정부주도의 21세기 사업이 이미 진행중이다. 1998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언어학자 전산학자 등이 공동추진중인 ‘세종프로젝트’가 그것.

이 가운데 번역프로그램과 직결되는 ‘전자사전’ 구축과 관련해 프로젝트팀은 국가 말뭉치(National Corpus)로는 최대규모인 영국 BNC(British National Council)의 1억 어절 규모를 능가하겠다는 계획이다.

▲영어공용화냐 디지털화냐

미국의 서머언어연구소는 지난해 세계 228개국에서 통용되는 6700여개의 언어중 절반 이상이 2050년 안에 사라질 것으로 예견했다. 그렇다면 소수언어 사멸의 원죄는 모두 ‘인터넷 영어제국주의’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몇백명도 남지 않은 고유어 사용자 네트워크를 만들어 고유어를 보존하는 중국의 소수민족 ‘하카(Hakka)’ 등의 사례는 이런 주장에 쉽게 동의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의 덴츠인간연구소는 지난해 ‘경제회복을 위한 아시아의 도전’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10년안에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는 언어는 성장하고 그렇지 못한 언어는 위축될 것’으로 예견했다.

네트워크의 구축이란 다름아닌 현재 언어자산의 정리정돈과 디지털 정보화. 인터넷 공간에서의 언어전쟁은 ‘영어냐 모국어냐’의 선택이기보다 자국어정보를 얼마나 경쟁력있게 디지털화했느냐로 판가름날 전망이다.

미국 어린이들에게 영국책 사보기 붐을 일으킨 동화 ‘해리 포터’의 사례가 일깨우는 것도 그것이다. 문제는 인터넷이 아니라 미국 아이들에게 기꺼이 영국식 영어를 읽게 만들었던 그 매혹적인 ‘콘텐츠’라는….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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