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진단]'청진동 해장국골목' 재개발놓고 입씨름

  • 입력 2000년 2월 9일 23시 12분


《‘해장국 골목’으로 유명한 서울 종로구 청진동 일대를 지상 18∼24층의 초고층 빌딩 숲으로 재개발하는 문제를 놓고 관할 구청과 주민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종로구는 청진동 일대에 국제컨벤션센터 등 19개 빌딩을 짓고 빌딩지하를 한 공간으로 연결하는 방식의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고층, 고밀도 개발은 현실성이 없고 장기간 건설사업이 계속될 경우 영업권 등의 피해가 크다며 재개발 구역 지정을 해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 현황 ▼

정부는 79년 청진동 일대 2만3500여평 19개 지구를 재개발구역으로 지정했으나 20년이 지난 현재까지 제일은행 본점 건물 등 2개 지구를 제외한 나머지 17개 지구는 20년 전 그대로 방치돼 있는 형편이다.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뒤 2층 이상 건물의 경우 층수를 올리지 않는 조건으로만 개축이 허용돼 전체 456개동 건물 가운데 77.4%인 353개동이 2층 이하의 저층 건물이다.

종로구는 2002년 착공을 목표로 재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으나 참여하려는 업체가 나서지 않아 사업 시행 시기가 불투명한 상태다.

▼ 구청의 재개발 계획 ▼

종로구 관계자는 “97년 일부 건설업체들이 사업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겪으면서 업체들이 참여 의사를 철회했다”며 “사업자만 나서면 공사를 즉시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종로구는 지난해 4월 청진동 일대에 지상 18∼24층, 지하 2∼7층 규모의 초고층 빌딩 19개를 세우는 내용의 ‘종로비전 5개년 발전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각 빌딩의 지하가 모두 연결되고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5호선 광화문역을 연결하는 통로가 만들어져 청진동 일대는 고층 빌딩과 대형 지하상가가 공존하는 형태로 개발된다.

또 빌딩 사이에 민속저자거리, 전통놀이 마당, 보행자 전용도로 등을 만들어 인근 인사동 과 경복궁 덕수궁 등을 연결하는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해장국집 20여곳을 한곳에 모아 청진동의 전통성을 살려 나간다는 계획이다.

▼ 주민 입장 ▼

청진동 재개발구역의 지주회 등 4개 주민단체는 지난해 12월 정부 고충처리위원회와 서울시 의회 등에 재개발계획 철회를 요구하는 민원서류를 제출했다.

이들 단체는 “지주 226명 가운데 86.3%인 195명이 종로구의 재개발 방안에 반대하고 있다”며 “자력 개발을 통해 전통문화의 거리로 조성하는 편이 현실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지주회 대표 강학일(姜學日·54)씨는 “21년째 재개발구역으로 묶여 피해를 보고 있는데 구청이 일방적으로 또 몇십년이 걸릴지 모르는 방대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며 “구청은 지주들이 알아서 재개발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뒷받침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청진동 일대 점포를 임대해 장사를 하고 있는 세입자들의 반대도 거세다. 구청의 계획대로 ‘빌딩 타운’ 건설이 추진될 경우 장기간 영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단체와 도시전문가들도 서울의 도심인 청진동 일대를 빌딩숲으로 만드는 계획에 반대하고 있다.

도시연대 최정한(崔廷漢)사무총장은 “청진동 재개발 문제는 종로 전체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며 “다양한 문화 업무 유흥 기능이 복합돼 있는 청진동이 획일적인 고층 업무타운으로 변모할 경우 교통난은 물론 종로라는 역사 문화적 공간이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최총장은 또 “해당 주민들에게 전적으로 개발을 맡길 경우 마구잡이 개발로 인한 부작용도 예상된다”며 “단순히 해장국 동네라는 이미지를 살리는 차원이 아니라 서울의 대표 도심의 다양성을 살리는 차원에서 신중하고 체계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한 연구원도 “청진동은 구청이나 지주, 점포운영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매일 그곳을 이용하는 수많은 시민의 공간이기도 하다”며 “종로의 특성을 무시한 획일적인 고층타운 건립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명건기자> gun43@donga.com

▼ 청진동의 유래 ▼

서울 종로구 종로1가 서울관광호텔에서 종로구청으로 이어지는 청진동 골목은 조선시대 육조(六曹) 등 관청이 밀집했던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와 대표적인 상가였던 육의전(六矣廛·종로2가 일대) 사이에 위치해 고급 술집이 번창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간단히 요기를 할 수 있는 술집 밥집도 많았다.

이곳에는 서울 사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사람이 모여들어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는 음식이 개발됐다. 이곳 술국이 ‘대감댁 곰국’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

1930년대까지만 해도 해장국을 파는 ‘장국밥집’, 술을 병으로 파는 ‘병술집’, 기녀들이 나오는 ‘은집’ 등이 있어 서울의 전통적인 유흥가로 꼽혔다. 해방이후 70년대까지는 술꾼들의 속풀이 장소로 유명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심야영업 자유화 등으로 다른 곳에도 ‘술국집’이 생기면서 이곳의 명성이 퇴색하기 시작, 지금은 20여곳의 해장국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정보기자>suhchoi@donga.com

▼ 전문가 의견 ▼

도시계획 전문가들은 조선시대 초부터 서울의 중심이었던 종로구 청진동 일대를 고층 고밀도로 개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또 청진동 재개발에 주민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야 하지만 현재 주민들의 주장대로 ‘알아서 개발하는’ 방식은 마구잡이 개발이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선 청진동 개발은 서울의 역사적 문화적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종로 전체를 어떻게 개발하고 보존할 것인지를 정한 뒤 추진해야 한다는 것.

전문가들은 청진동 일대가 조계사, 갑신정변의 진원인 우정총국(현 체신박물관), 전통 한옥이 남아 있는 북촌(가회동), 인사동 등을 아우르는 종로의 첫 관문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곳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거나 마구잡이로 개발되면 나머지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성을 아무리 잘 보존해도 그 의미가 크게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경기대 건설공학부 이상구(李相球)교수는 “청진동을 과거 무교동처럼 고층빌딩 중심의 업무지역으로 개발하는 대신 옛 골목과 기능을 최대한 살리는 ‘수복(修復)형’ 방식으로 개발해야 한다”며 “기존의 도시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방식의 개발은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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