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의 우리문화 우리건축]정보통신시대의 건축

  • 입력 1999년 12월 12일 19시 47분


여보세요?”

물음인가 대답인가. 우리의 대화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그 애매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통신은 우리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21세기는 정보통신의 시대가 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이다.

그러나 건축의 입장에서 본 지난 20세기는 교통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도시와 건축을 규정지은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자동차의 보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도시는 지난 수 천년간 한발 한발 변해왔지만 20세기의 자동차는 그 크기와 내용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바퀴와 엔진이라는 탁월한 발명품은 인간이 이동하는 속도와 거리를 이전 시대엔 꿈도 꾸지 못하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자동차-숫자가 넘치는 시대▼

도시가 그만큼 커졌다. 그 도시를 종횡으로 가로 지르면서 곧게 뻗은 도로가 생겼다. 그 도로는 자동차의 몫이었다. 거리 곳곳에는 주유소와 자동차 정비소라는 새로운 건물이 생겼다. 주차장이라는 새로운 공간도 필요해졌다. 주차장이 건물 지하에 들어서게 되면 주차 구획선의 배치는 건물의 기둥 간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자동차의 원활한 이동은 건물의 다른 모든 부분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교통의 총아 자동차는 도시와 건축의 가장 중요한 의미였던 인간에 대한 가장 위협적인 도전이 되기 시작했다.

통신은 교통의 역할을 하나둘 떠안기 시작했다.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알릴 책임을 맡은 아테네 병사는 그 먼 거리를 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을 다해 달릴 필요 없이 전화 한 통화면 그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는 전투의 승패뿐 아니라 미군의 폭격기가 이라크에 쏟아 부은 미사일의 궤적까지 모두 추적해내는 시대가 된 것이다.

▼소방서의 망루도 사라지고…▼

통신은 당연히 건축에도 변화를 요구했다. 도시 곳곳에는 공중전화라는 구조물이 등장했다. 통신의 발달이 바꿔놓은 가장 상징적인 건물은 소방서다. 봉화에서 솟아오르는 연기를 지켜보던 포졸처럼 소방관이 올라가서 마을을 내려다보던 망루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소방서의 망루을 에워싸고 더 높은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섰다. 전화가 그 해결책이 되었다. 119.

소방서는 이제 높은 망루가 아니고 건물에 새겨진 숫자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상업 시설도 발 빠르게 변신했다. 아파트 단지에는 손님이 앉을 좌석을 아예 없앤 중국음식점과 피자집이 등장했다. 전화로 받은 주문에 따라 양철가방을 실은 오토바이가 거리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건물이고 사람이고 숫자로 치환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통신으로 전달되는 대상이 되었다. 주문 받는 곳은 전화번호로, 주문하는 곳은 아파트 호수로 지칭되었다.

숫자로 치환되는 것의 백미는 화폐. 그런만큼 경제는 통신의 시작이자 끝으로 자리 잡았다. 통신의 발달은 현금 유통의 의미를줄여나갔다.월급은온라인으로 입금되어 통장의 숫자변화로 표현될 따름이다. 자동차로 현금을 실어 나르는 대신 통신으로 숫자가 오가는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은행은 통신의 발달에 가장 신속하게 반응해야 했다. 건물도 다르지 않다. 은행 네트워킹이 확립되면서 현금인출기가 등장했다. 건물은 이 새로운 기계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했다. 은행건물 구석에는 아예 현금인출기를 위한 공간이 별도로 자리를 잡았다.

▼보안용 쇠창살에 갇힌 은행▼

그러나 건물로 본 은행은 아직 그렇게 탄력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다. 은행의 출입구는 그 대표적인 모습이다. 은행에서 나가는 손님은 문을 밀지 말고 잡아당겨야 한다. 은행에 침입한 무장강도가 은행에서 도망 나가는 시간을 늦추고 그만큼 경찰의 출동시간을 벌자는 전시대의 사고가 우리의 은행에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21세기의 은행강도는 권총을 들고 은행 영업장에 들이닥치는 것이 아니고 은행의 네트워크에 들어가서 유령계좌를 만들고 예금액을 이동시킨다.

불이 났을 때 사람들이 빠른 시간에 문을 밀고 나가 피신해야 한다는 원칙은 무시하고 무장강도를 가두기에 급급한 은행은 21세기의 주역이 될 수 없다. 창문마다 쳐진 쇠창살로 보안을 유지한다는 은행, 저녁 10시면 현금인출기 작동을 멈추는 은행은 이미 경쟁력이 없음을 실토하고 있다.

▼건물은 '사람을 담는 그릇'▼

현대의 통신망은 증권거래소라는 건물 자체도 전근대적인 것으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텔레뱅킹의 발달은 은행 지점이라는 건물을 점점 무의미하게 만들 것이다. 전화와 인터넷은 수많은 건물 형식을 역사에서 지우고 새로 그려나갈 것이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었는지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축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았다. 자동차에 맞서 사람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건축가가 해야 할 작업이었다. 숫자로 치환된 익명의 인간이 아니고 따스한 온기를 지닌 인간을 담는 그릇을 만드는 것이 건축의 숙제다. 건축의 의미는 단순히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21세기 달라질 건물 모습 너머에 고스란히 남을 것이다.

서현<건축가>hyun1029@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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