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이명우/엉터리 방송인에 멍드는 한글

  • 입력 1999년 10월 8일 19시 29분


일상 방송언어는 한글 표준어규정에 맞는 표준어를 사용함으로써 국어순화운동에 앞장서야 하는데도 요즘 각종 방송에서 표준발음법에 어긋나는 발음이 자주 나타난다.

표준발음법에 맞지 않는 발음으로 시청자들의 귀를 자극하는 사례를 들어보면 ‘북한→부간’ ‘기록하다→기로가다’ ‘기각하다→기가가다’ 등이 있다. ‘조잡한’을 ‘조자반’으로, ‘법학’을 ‘버박’으로, ‘조급하게’를 ‘조그바게’ 등으로 발음하는 방송인도 있다. ‘느긋한’을 ‘느그단’으로, ‘탓하다’를 ‘타다다’로, ‘못하다’를 ‘모다다’ 등으로 발음하는 예도 많다.

이같은 방송언어는 표준발음법을 무시하고 문법체계를 혼란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말의 힘찬 역동성을 약화시킴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맥이 풀리는 듯한 느낌을 갖도록 한다. 미국 영어에서는 간혹 t가 묵음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독일어에서는 b, d, g가 때때로 p, t, k로 발음됨으로써 그 언어에 생기와 박력을 더한다.

우리의 모음과 기타 부분에서도 일부 왜곡현상이 드러난다. 즉 ‘되다’를 ‘뒈다’‘돼다’로, ‘과거’를 ‘가거’로 ‘세계’를 ‘셰게’로, ‘경제’를 ‘겡제’로, ‘…의’를 ‘…으’로 발음하는 사람들도 있다. ‘보인다’를 ‘보여진다’로, ‘된다’를 ‘되(뒈)어진다’로, ‘이것이’를 ‘이거가’로 말하는 예도 흔하다.

국립국어연구원에도 이런 것을 지적하는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고 들었다. KBS 라디오1에는 매일 아침 7시경에 ‘바른 말 고운 말’ 방송순서가 있는데 여기서도 이러한 점을 좀 다루어 주었으면 한다.

15세기초 신성로마제국의 시기스문트 황제가 대주교 회의 연설도중 몇 군데 문법 상 오류를 범하자 대주교 한 사람이 이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나섰다. 그러자 황제는 “짐은 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모든 법 위에 군림한다”고 말하며 자신의 지고한 권위만 앞세웠다. 그때 대주교는 굴하지 않고 “왕도 문법에는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는 고사가 있다.

황제와 맞서 이러한 문법논쟁을 벌일 만큼 대담했던 대주교의 용기는 문법이 모든 권위를 능가하는 이성법칙 체계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문법은 이처럼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최고의 법이다.

발음규칙을 조금 어겼다고 해서 문맥상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영향력이 엄청난 방송이 제나라 말의 발음규칙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방송이 이런 오류를 그대로 방치하기 시작하면 어린이 국어교육에 지장이 생길 뿐만 아니라 나중엔 지금의 발음규칙을 그에 맞게 다시 뜯어고치고 국어 문법 교과서도 다시 써야 하는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한글은 우리 조상들의 얼이 빛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우리가 여태껏 애써 쌓아올린 공든 탑을 우리 스스로 허무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한글날을 맞아 특별히 방송계에 종사하는 분들이나 간혹 이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표준 어법을 어기지 않도록 명심해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방송언어의 오류는 이미 표준어법에 익숙해진 애청자들로부터 본의 아니게 반사적인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고 망국적인 지역감정까지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한글과 그 문법을 지켜나가는 일은 후손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문법은 모든 법 중의 법이다.

이명우(충북대 교수·독문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