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밀레니엄 베스트]사라토가 전투

  • 입력 1999년 8월 22일 19시 47분


1777년 6월22일, 8200명의 노련한 병사들이 미국 독립군과 싸우기 위해 캐나다의 기지를 출발해 남쪽을 향했다. 병사들 중에는 푸른 군복을 입은 독일 병사들, 싸움에 출전하기 위해 얼굴과 몸에 그림을 그려 넣은 인디언들, 진홍색 군복을 입은 영국 보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사령관은 영국 의회 의원이며 극작가인 존 버고인 장군. 성품이 유쾌한 그를 병사들은 신사 자니라고 불렀다.

버고인 장군의 작전은 처음에는 계획대로 잘 진행되었다. 난공불락의 티콘더로가 요새가 쉽게 점령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원래 계획과는 달리 남쪽을 향해 도보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과 그의 부대가 3주 만에 사라토가 북쪽의 허드슨 강에 도달했을 때 미국 병사들은 이미 전열을 가다듬은 뒤였다.

캐나다에 있는 기지와의 연락도 쉽지 않았기 때문에 버고인은 올버니를 공격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 독립군의 워싱턴 장군은 치열한 전투를 예상하고 호라티오 게이츠 장군의 부대에 베네딕트 아널드가 이끄는 1200명의 병사와 대니얼 모건이 이끄는 500명의 소총병을 지원부대로 파견했다.

9월19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버고인은 게이츠 부대의 측면을 포위해서 적을 강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그러나 게이츠의 부대는 참호에서 나오려하지 않았다. 아널드는 궁지에 몰려 있는 게이츠의 선발대를 격려하며 신들린 듯 종횡무진했다. 정오부터 해질녘까지 계속된 전투는 승패가 결정되지 않은 채 끝났지만 영국군은 부대원의 3분의 1을 잃었다.

그러나 바로 그 날 필라델피아에 있던 대륙 회의는 랭커스터로 도망쳤고, 11일 뒤에는 그보다 더 서쪽에 있는 요크까지 밀려났다. 미국 독립군이 이처럼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10월7일에 버고인이 사라토가에서 다시 한번 치른 전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날 게이츠는 아널드를 시기해서 그에게 임무를 주지 않았다. 아널드는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분노에 차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게 지휘권을 주지 않아도 나는 병사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그리고 병사들은 나의 지휘를 따를 것이다.”

아널드의 외침은 현실이 되었다. 전투 중 아널드의 말이 죽었고, 아널드 역시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부대는 승리를 거뒀다. 버고인은 10월17일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투 결과 프랑스가 미국 독립군 측으로 참전했다. 미국의 독립을 향한 길이 활짝 열린 셈이었다. 사라토가 전투는 대영제국의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새로 태어날 미합중국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었다.

▽필자:R W 애플 주니어〓뉴욕타임스 기자

(http://www.nytimes.com/library/magazine/millennium/m1/app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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