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밀레니엄/나치즘 출현]낙방생 「세상향한 투정」

  • 입력 1999년 8월 8일 18시 26분


소년은 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어머니와 친척들이 모아준 여비를 가지고 빈으로 올라온 18세 소년은 시내를 돌아다니며 고풍스러운 건물들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저녁이면 도나우 강변을 거닐며 마음 속에 화가로서의 앞날을 그려보곤 했다. 그러나 소년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술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입학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수험생 아돌프 히틀러. 미술에 대한 재능 부족. 입학 불허.’

미술학교에서 보내온 불합격 통보를 받아들고 실의에 빠진 이 소년. 그가 바로 20세기 인류를 유례없는 전란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한 희대의 독재자 히틀러였다. 만약 ‘소년 히틀러’가 미술학교에 합격했다면 히틀러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리는 그를 ‘독재자 히틀러’가 아닌 ‘화가 히틀러’로 기억하게 됐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명의 무명화가로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히틀러의 미술학교 낙방은 히틀러 그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안타까운 장면으로 남는다. 나치즘의 출현은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말수 적고 수줍음 많았던 소년이 ‘독재자 히틀러’가 되기까지에는숱한우연들이숨겨져 있었다.

“그때 히틀러가 만약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인류가 두고두고 되씹어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1907년 10월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한 히틀러는 화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한번 시험에 도전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예 응시자격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히틀러가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기회는 또 있었다. 그의 불합격 소식을 들은 고향의 이웃집 부인이 그에게 편지 한통을 보내왔다. 그 안에는 당시 빈의 유명화가 롤러 앞으로 보내는 추천서가 들어 있었다.

“재능있는 소년이니 문하생으로 받아달라”는 내용이었다. 히틀러는 뛸듯이 기뻐하면서 몇번이고 이 편지를 읽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그의 성격이 롤러를 찾아가는 걸 머뭇거리게 했다. 끝내 히틀러는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히틀러의 미술에 대한 집착은 평생을 두고 떠나지 않았다. 그는 총통이 된 뒤에도 자신을 항상 예술가로 생각했다.

1945년 4월30일 베를린의 벙커에서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에서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내가 미술품을 수집한 건 사적인 욕심이 아니었다. 내 고향 린츠에 미술관을 건립해 기증할 생각이었다.”

화가의 꿈을 접은 히틀러는 좌절감과 세상에 대한 증오감을 쌓기 시작한다. 그는 부랑자로 전락해 싸구려 하숙집과 간이 숙박소를 전전하며 품팔이 노동자로 살아갔다. 때묻은 옷차림에 궁핍한 하층민들과 어울리면서 그는 극단적인 독일민족주의와 반(反)유태인 의식을품게된다.세상을 향한 적개심과 광기 어린 이상성격이 굳어진 것도 이때였다. 결국 빈의 뒷골목생활은히틀러의성격과 나치스 이념의기초를쌓은과정이 된 셈이었다.

히틀러 자신도 ‘나의 투쟁’에서 빈 시절에 대해 ‘내 일생의 철두철미한 학교’였다고 말하고 있다.

1914년 빈 생활을 마감하고 뮌헨으로 옮긴 히틀러는 바이에른 연대에 입대, 군인으로 변신한다. 1차대전에 참전하면서 그는 두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특히 1918년 영국군의 독가스 공격은 그의 한쪽 눈 시력을 빼앗을 만큼 치명적인 것이었다.

“나는 타들어가는 듯한 눈을 감싸쥔 채 비틀거리며 후퇴했다. 몇시간 후 내눈은 새빨갛게 타는 석탄이 되고 온갖 주변의 것이 캄캄해졌다.”(나의 투쟁)

‘가스 한모금’ 차이로 히틀러는 죽음에서 비켜갈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와 정치와의 인연도 ‘운명의 장난’처럼 찾아왔다. 1918년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뮌헨 육군 지구사령부 공보과에 배치됐다. 강의중 반유태인 웅변으로 상관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는 연대 교관 교육공무원으로 임명된다.

1919년 9월 그는 상관으로부터 독일 근로자당이라는 보잘것없는 정당의 회합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한심해 보이는 당원들의 토론을 따분하게 듣다 나가려던 그의 발목을 잡은 건 한 참석자의 말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프로이센과 절연해야 한다.”

그는 참지 못하고 발언에 나섰다. 카랑카랑한 쇳소리이면서도 선동적인 데가 있는 그의 웅변은 참석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회원 한명이 히틀러에게 건네준 소책자를 받아 오전 5시까지 숙독한 그의 두눈이 이글이글했다.

“내가 몇해나 걸려서 터득한 생각이 그 속에 들어있었다.”(나의 투쟁)

그날 늦게 히틀러는 독일근로자당 입당 허가를 받는다. 당원번호 555번. 그러나 사실은 겨우 7번째 회원이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단체가 바로 훗날 ‘국가사회주의근로자당’(나치스)으로 발전했다.

‘단 한방의 총알’이 히틀러의 목숨을 끝장낼 뻔한 순간도 있었다. 1923년 11월 뮌헨의 맥주홀 폭동 사건을 일으킨 히틀러는 뮌헨 중심가로 향하는 행진을 벌였다. 그는 경찰의 사격을 받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16명의 당원이 사망했지만 대열의 맨 앞에 있던 히틀러는 무사했다. 목숨을 건진 히틀러는 이 사건으로 일약 주목받는 인물이 됐다.

“우리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은 당신(판사)들이 아니다. 심판은 역사의 영원한 법정에서 내려진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은 우리에게 너희들은 반역죄를 범했는가, 범하지 않았는가를 묻지 않는다. 우리 국민과 조국을 위해 싸웠는가, 충성했는가를 물을 것이다.”

법정을 휘어잡은 연설은 언론을 타고 그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5년 금고형을 받고 레히강 위 란트스베르크 요새 교도소에 수감된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고 10여년 뒤 나치스는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희대의 독재자와 세계대전, 그리고 인류사에 유례없는 대량학살극은 이렇게 ‘우연의 숲’을 헤치고 착착 ‘준비’돼 갔다.

〈빈〓이명재기자〉m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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