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대담/우리말 지키기]평론가 정과리-저자 고종석

  • 입력 1999년 7월 9일 19시 30분


《한자병용정책의 시행을 놓고 ‘한글을 죽이는 폭거’‘진작 했어야할 일’이라는 상반된 주장이 격렬하게 맞붙는 한국사회. 인터넷의 일상생활 지배가 더 커지면 영어가 한국어와 공용어가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안감마저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가 고종석(40)은 자신의 산문집 ‘감염된 언어’를 통해 ‘외래어, 한자어로 인한 국어의 혼탁은 불가피하며 걱정할 일도 아니다’‘영어와 한국어 둘 중의 하나를 모국어로 택해야 한다면 영어를 택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문학평론가 정과리교수(41·충남대)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두 사람은 먼저 한글의 순수성에 관해 서로 다른 견해를 펼쳤다.》

▽정과리〓먼저 저자는 한국어에 대한 사랑은 한글만을 고집하는 집착이 아니라 타 언어에 대한 관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되도록 일찍부터 한자를 배워야 한다’라는 유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실 나 자신 어떤 언어도 순수한 언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혼혈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한국어를 지키면서 타 언어와 뒤섞이고 타 언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

▽고종석〓많은 사람들이 다른 언어, 특히 한자나 영어를 받아들이면 한글이 거기에 완전히 동화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점을 우려하는데, 나는 그렇다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걸 인위적으로 막으려 들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 한자어휘의 상당수는 원산지가 일본이고 특히 ‘문화어휘’ 대부분은 일본인들이 서양말 개념을 옮겨만든 한자어를 수입한 것이다. 말을 하지 않고 살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그 일제 한자어를 우리말에서 솎아낼 수는 없다.

▽정〓저자는 한국어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외솔 최현배, 한글학회로 이어지는 언어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파시즘에 정서적 탯줄을 대고 있는 언어순결주의’라고 비판한다. 한국어에 대한 애정과 한글순결주의에 대한 증오는 얼핏 모순돼 보이는데….

▽고〓한글이나 핏줄에 대한 애착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합리성의 규율 안에 가두지 않으면 그건 우리 모두를 망치는 길이다. 순수한 언어를 추출하려는 시도는 순수한 인종, 순수한 혈통을 추출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위험한 일이다.

두 사람의 격론은 영어공용화문제로 이어졌다.

▽정〓언어가 무엇인가부터 다시 생각해봤으면 한다. 언어는 표현의 도구인가, 생각을 담는 그릇인가.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면 한국어든 영어든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계관을 담는다면 좀 얘기가 다르다. 나는 ‘한 언어는 그것이 생존해온 역사 속에서 자기 세계관을 갖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어가 쓰인다는 얘기는 역사 속에서 지배자였던 적이 없는 ‘비지배자로서의 언어’가 쓰인다는 의미다. 영어가 갖지 못한 특질이 있고 그것을 통해 인류문화에 어떤 부분을 기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섬세하게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권마다 세계관의 차이는 너무 과장 해석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그렇지 않다. 한 예로 나는 현대 한국인의 화법이 지나치게 서양화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옛말처럼 에둘러서 말하기가 없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국제사회에서 활동하면서도 여전히 서양식의 직접화법을 구사하지 않아 서양인들이 그 정확한 의도를 해석하는데 애를 먹는다. 그렇게해서 중국인들은 자기네 어법과 사고방식을 관철하고 있는 것이다.

▽고〓물론 언어는 도구만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앞선 도구인 것도 사실이다. 언어와 음악 미술 수학의 관계를 한번 살펴보자. 나는 언어가 음악 미술보다는 수학쪽에 가깝다고 본다. 물론 언어에도 음악 미술같은 표현적 기능이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이 존재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프랑스에서고 아프리카에서고 3+2〓5라는 수학적 약속이 통하는 것처럼 언어도 편리한 도구로서 공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영어가 공용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한국어가 소수언어지만 ‘박물관언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단지 예측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차원이다. 저자는 소설가이자 번역가 산문가이고, 어쨌든 죽을 때까지 한국어로 글을 쓸 사람이다. 한국어의 생존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고〓지금 우리는 19세기말, 20세기초 신소설을 현대말로 번역해서 읽거나 각주를 달아 읽는다. 내가 남긴 작품이 읽힐 필요가 있다면 몇 백년 후 미래 어느 때의 언어로라도 번역돼서 읽히지 않겠는가.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감염된 언어」고종석지음/개마고원 271쪽/7500원▼

‘모든 언어는 혼혈이며 순수한 언어란 없다. 언어의 역사는 감염의 역사다’라는 것이 저자의 핵심적 생각. 이는 독창적이고 급진적이며 때론 자기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청소년기 외솔 최현배의 ‘우리말본’을 읽으며 사전편찬자의 꿈을 품었다. 그러나 한글순결주의에 대해서는 파시즘적 발상이라고 공격.

소설집 ‘제망매’를 펴낸 저자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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