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삶·예술]크리스토와의 만남

입력 1999-07-09 02:27수정 2009-09-23 23:19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백남준이 독일에서 유명해진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과격한 해프닝과 퍼포먼스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가지의 이유는 남들은 한 대도 갖기가 쉽지 않은 피아노를 4대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또 백남준이 아예 피아노 4대를 끼고 그 사이에서 잠까지 잔다는 묘한 소문이 그를 한층 이상한 사람으로 인식시켰다.

조셉 보이즈 편에서 이미 밝혔듯이 이 피아노는 파르나스 화랑 주인 롤프 옐링이 이바하 피아노 회사에서 얻어 준 고물이었지만 연주자가 아닌 행위예술가들에게는 고물이든 새것이든 피아노 소리만 나면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가 사용하였던 피아노 가운데 하나는 생산번호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었는데, 보불전쟁때인 1870년에 생산된 골동품이었다. 백남준은 이 피아노를 63년 그의 첫 전시회에서 ‘조정된 피아노’(피아노 건반사이에 온갖 잡동사니를 끼워 넣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제작된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그후 이 작품은 오스트리아 빈의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이 피아노에 얽힌 사연 가운데 백남준과 세계적인 신사실주의 설치예술가 크리스토 야바체프(보통 크리스토로 일컬어짐)와의 악연(?)은 가난한 청년예술가의 인생역정을 느끼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에피소드이다.

백남준이 크리스토를 처음 만난 것은 61년 독일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바우어마이스터에서였다. 당시 백남준은 29세, 크리스토는 24세였다.

37년 불가리아의 소피아에서 태어난 크리스토는 21세에 고향을 떠나 당시 유럽 현대미술의 중심지이던 독일 뒤셀도르프 쾰른 부퍼탈 등지에 머물며 플럭서스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63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그는 당시 유럽화단에 돌풍을 일으키던 신 사실주의(누보 레알리즘)미술운동에 가담하면서 국제적인 작가로 발돋움하였다.

크리스토는 건축물 등 사물이 가진 정치 사회적 성격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방법으로 ‘물건 싸기’를 시작하여 70년대에는 미국 마이애미에 있는 섬을 천과 플라스틱으로 감싸기도 하였다. 80년대에는 파리 센강의 아홉번째 다리인 퐁뇌프 싸기, 90년대에는 일본 미토지역의 자연환경을 변화시키는 우산프로젝트, 97년에는 독일 의회의사당을 완전히 천으로 감싸 타임지 표지에 소개되는 등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다.

백남준은 당시 크리스토가 “불로 지져 누룽지처럼 색깔이 바랜 이상한 드로잉작품을 간혹 보여주면서 나에게 작품을 평해달라고 부탁한적이 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62년 크리스토는 쾰른의 라우후스 화랑에서 데뷔전을 가졌다. 백남준은 평소 크리스토가 작품을 보여주며 소감을 물어보는 등 싹싹하게 대했던 기억을 살려, 또 서로 약소국가 출신이라는 무언중의 교감을 내세워 전시장을 방문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선 백남준은 작품감상은 고사하고 우선 자신의 피아노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 피아노는 백남준이 플럭서스그룹 동료인 미국의 벤저민 패터슨을 위한 콘서트에 빌려주었던 것으로 행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돌려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크리스토가 백남준의 피아노 두 대를 광목으로 둘둘 말아놓았거나 피아노 다리와 몸통을 덕지덕지 흰색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이었다. 오늘날 크리스토를 유명하게 만든 오브제를 싸는 행위와 칠하기는 이미 첫 전시에서부터 그 싹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크리스토를 불러 불편한 심기를 전달한 다음 전시가 끝나면 당장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고 전시 마지막 날에 피아노를 되돌려 받았다. 백남준은 크리스토가 광목으로 둘러쌌던 피아노를 한적한 길가에 펼쳐놓고 모두 벗겨낸 뒤 재수가 없었다는 듯 페인트를 지우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라우후스 화랑주인 하로 라우후스는 백남준의 이러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백남준의 또 다른 거리 콘서트로구먼” 이라며 웃었다.

만약 백남준이 이 작품을 해체하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더라면 수년 후에 수 억원 대에 이를 엄청난 예술작품이라는 사실을 이 두 사람은 예측도 하지 못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크리스토의 첫 오브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리스토의 첫 오브제 작업은 이렇게 무참하리만큼 손쉽게 해체되고 말았다.

백남준이 이 사실을 영원히 공개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희대의 사건은 영원히 비밀 속에 묻혔을 것이다. 크리스토가 그토록 유명한 작가가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백남준은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그의 자전적 에세이에다 모두 밝혔다.

크리스토는 이 전시에서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하였으며 전시후 모든 작품을 고철상에게 불하해버렸다. 이 전시의 결과에 크게 실망한 크리스토는 부퍼탈을 떠나 프랑스로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그러한 선택은 결정적으로 그가 누보 레알리즘, 즉 신사실주의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 후 그는 누보레알리즘의 창시자 피에르 레스타니를 만나 누보 레알리즘의 주요작가가 되었으며 같은 길을 가는 작가이며 일생 동반자인 장클로드를 만나 결혼도 하였다.

백남준은 크리스토와의 만남도 보이즈와의 인연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아무에게도 팔 수도 살 수도 없는 아름다운 삶의 소프트웨어라고 설명한다. “우리들의 추억이나 꿈은 정말이지 사적인 것이다. 재벌의 창시자가 자신의 회사장부를 펼칠 때처럼, 혹은 큰 부동산업자가 토지문서를 하나 하나 점검할 때처럼 나는 내 추억의 소프트웨어를 자랑으로 혼자 즐긴다.”

아무튼 이 시대의 주요작가들인 백남준이나 크리스토 모두가 미술사를 바꿀 만한 구조적이고 혁명적인 소명의식에 의하여 자신을 던지고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간혹 옛날의 피아노이야기를 나누며 쓴웃음, 파안대소를 함께 즐긴다. 크리스토 왈, “사람 쉽게 보지 마라,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기회가 온다.”

이용우<미술평론가>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