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인류모험史]산에 오르는 사람들

  • 입력 1999년 6월 20일 21시 16분


필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에서 느끼는 자연의 힘과 영감을 고작해야 그림과 책을 통해 접했을 뿐이었다. 스키도 도보여행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닌 필자로서는 12세 때 버몬트주의 그린산맥에서 열린 여름 캠프에 갔다가 길을 잃은 것이 산을 가장 가깝게 느낀 경험이었다.

그런데도 프랑스의 프로방스에 있는 생트빅투아르 산과 방투 산을 등반할 기회가 왔을 때 필자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 두 산이 프로방스에 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였고, 이들이 세잔과 페트라르카를 사로잡은 산들로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였다. 세잔은 생트빅투아르 산이 문명의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장엄한 자연의 현대 예술적 표본이라고 생각했다. 페트라르카는 그저 산이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던 시절인 1330년대에 방투 산에 올랐었다.

페트라르카는 남자 형제와 함께, 세잔은 에밀 졸라와 함께 산을 올랐기 때문에 필자에게도 같이 산을 오를 사람이 필요했다. 파리에 살고 있는 영국인 친구 앨런에게 연락을 했다. 앨런은 생기있고 용감한 친구였지만 육체적인 운동을 그리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이 점 때문에 필자의 이상적인 동반자였다. 그가 필자를 산정상에 내버려두고 혼자서 휘적휘적 가버리지 않으리라고 굳게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앨런과 필자는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1010m 높이의 생트빅투아르 산을 함께 오를 안내인 다니엘을 만났다. 단단한 몸매에 졸린듯한 눈을 한 그는 마치 잠간 산책이라도 나가는 사람처럼 가벼운 스웨터 위에 잠바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차림이었다. 반면 커다란 등산화와 두툼한 잠바를 입은 필자와 앨런은 남극 탐험이라도 떠나는 사람들 같았다. 다니엘은 담배를 뻐끔거리면서 측은하다는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고 우리는 왠지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지만 산은 원래 존경과 경탄의 대상이 아니었다. 현대인들은 당연히 태초부터 사람들이 즐거움을 위해 산에 오르며 산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를 썼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서구 역사에서 산이 감탄의 대상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산이 황량한 곳이라고 생각했고 영국의 시인 존 던(1572∼1631)은 산을 가리켜 지구 표면에 생긴 사마귀라고 했다. 그리고 루터는 산이 인간의 타락에 대해 신이 내린 징벌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생트빅투아르 산을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세잔이 58세 때인 1897년에 친구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이 산을 올랐을 때 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길을 따라 우리를 안내하고 있었다. 길은 소나무와 로즈마리 덤불 사이로 계속 올라가다가 비옹 호수와 졸라 호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에서 산 정상인 피크 데 무슈(파리 봉우리)밑의 버려진 수도원까지 갈지(之)자로 이어져 있었다.

수도원은 바위 사이의 틈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틈은 세잔이 즐겨 그렸던 절벽 위로 튀어나온 바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바위는 좁고 미끄러워서 북서풍이 불어오면 매우 위험하다는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바위 위에 서면 마르세유 시가지와 바다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길은 그곳에서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간단히 말해 아주 좋았다. 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에 대한 판에 박힌 찬사들을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은 생각은 없었다.

산을 찬미하는 판에 박힌 문학적 표현이 있다면 그림에도 그런 표현이 있다. 19세기초에 케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가 그린 신파적인 그림은 이전에 종교화와 서사시가 차지하고 있던 위치까지 풍경화를 끌어올린 낭만주의의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세잔은 산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라 산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그림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가 그린 생트빅투아르 산의 그림들은 종교적 작품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내향적이라는 점에서 현대적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산을 내려온 뒤 우리는 다니엘과 작별인사를 하고 방투 산으로 향했다.

1900m높이의 방투 산을 안내해줄 안내인의 이름은 티에리였다.

필자는 배낭에서 미리 복사해두었던 페트라르카의 글을 꺼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넋을 잃고 서 있었다. 우리 발밑의 구름을 보자 아토스와 올림포스에 관해 내가 읽은 것들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이 그보다 덜 유명한 산에서 같은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그 시대에 순전히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 오른 최초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등산을 하면서 경험한 것에 대해 그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글을 썼다. 그래서 현대의 등산가들은 그를 최초로 현대적 의식을 가졌던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도 방투 산의 정상에 서서 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낀 순간이 있었다. 등산길에 가지고 온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펼쳤을 때 초라한 곳에서도 신의 존재를 느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산의 높은 곳’에서 경탄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구절에 우연히 눈길이 머물렀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세속적인 것들에 감탄하는 나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 책을 덮었다… 나는 산을 이미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의 내부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때부터 우리가 밑에 도달할 때까지 내 입에서는 한 마디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휴식을 끝낸 우리는 티에리를 따라 얼음과 눈으로 덮인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 정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힘겹게 찾아간 정상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도로였다. 군사기지와 식당도 눈에 띄었다. 1900m를 걸어 찾아간 곳에 차가 달리고 있는 것을 보니 맥이 빠졌다.

옛날에는 산이 경탄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그렇다면 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도시화와 자연 정복이 진행된 결과라고 말하곤 한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시골의 매력이 커졌고, 여행이 쉬워지면서 산이 옛날처럼 들어가기 힘든 곳으로 느껴지지 않게 되어 산에 대한 공포가 즐거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이론이 모두 맞는 것은 아니다. 18세경부터 공포는 미학적인 경험의 일부가 되었고, 등산은 그 모범적인 예였다. 경외심과 공포는 즐거움을 동반한다고 여겨졌다.

방투 산의 정상에서 앨런은 휴대전화로 아내와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동안 필자는 오늘날에는 장엄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필자〓마이클 키멜만(뉴욕 타임스 미술평론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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