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38]선진국 은퇴자 프로그램

  • 입력 1998년 11월 22일 18시 21분


의학의 발달이 열어놓은 장수시대. 그러나 정년제도는 평균 수명이 길어진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게다가 명예퇴직이다 조기퇴직이다 해서 머리가 희끗해지기도 전에 은퇴자로 분류돼 사회 뒤켠으로 밀려나는 ‘젊은 노인’들이 많아졌다. ‘노년은 길고 할 일은 없는’ 서글픈 현실이다. 그만큼 노년층에 대한 제도적인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노동부 실업 통계를 보면 전체 실업자에서 5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94년 7.8%(3만8천명)에서 97년 9.9%(5만5천명)로 서서히 증가해왔다. 그러다 올 3·4분기(7∼9월)엔 14.6%(23만4천명)로 껑충 뛰었다.

95년까지만 해도 연령대별 실업자수는 20대가 가장 많고 이어 30대, 40대, 10대(15∼19세), 50대 이상 순이었으나 96년부터는 50대 이상 실업자수가 10대를 앞질렀다. 노동시장에서 고령자들이 젊은이들에 밀려나는 셈.

직장에서만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다. 여가를 즐기고 싶어도 갈 곳이 없고 좋은 일을 하겠다고 나서도 ‘끼어’주지 않는다.

수학교사 출신 주부 김순희(金順姬·55·서울 서초구 반포동)씨. 두 아들 뒷바라지가 끝나자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유가 생겼다. 가출 청소년들에게 수학을 지도할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사회단체에 전화를 걸었다. 그 단체 직원은 “유독 수학과목 지원자가 없어 난처했다”면서도 김씨의 나이를 묻고는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냉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연락은 없었다.

문화센터로 발길을 돌려 노래교실과 건강 디스코 강의실을 기웃거려봤지만 템포가 30∼40대 주부들 위주여서 김씨 체력으로는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김씨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에 너무 민감한 것 같다”며 “나이 든 사람들에게 사회의 문은 닫혀있다”고 한숨지었다.

“우리나라 노인문제 중 가장 심각한 것은 은퇴자 프로그램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는 겁니다. 은퇴후 제2의 인생을 보람있게 보낼 수 있도록 재취업 자원봉사 취미활동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줘야 합니다.”(고양곤·高兩坤 강남대 노인복지학과교수)

선진국 은퇴자들은 이런 설움을 모른다. 미국인들은 ‘진정한 삶은 은퇴와 함께 시작된다’고 말할 정도다. 86년 개정된 연령차별금지법에 따라 거의 모든 직종에서 강제퇴직 제도가 사라져 원하는 사람은 계속 일할 수 있다.

대부분 미국 노인들은 사회 봉사와 취미 활동에 몰두한다. 55세 이상 은퇴자 약 15만명이 ‘은퇴자 자원봉사프로그램’을 통해 지역사회에 봉사한다. 보조교사, 장애인 운전교습, 거동이 불편한 노인집의 세탁 청소 등 봉사의 종류만도 6백가지가 넘는다.

기업이나 음식점 제과점 약국 등에서 경영자로 일하다 은퇴한 사람들로 구성된 ‘은퇴한 경영인 봉사단’은 현직 경영인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준다.

‘양(養)조부모 사업’은 고아원이나 장애인 시설에 수용된 아이들에게 할아버니 할머니 역할을 해주는 활동. 유급이어서 저소득 노인들이 선호한다.

영국에선 퇴직자도 상근 또는 비상근으로 일할 기회가 많다. 물론 임금은 줄어든다. 자동차제조업체 롤스로이스는 회사안에 노인복지공장을 따로 마련해 낡은 엔진 분해, 부품 선별, 작업복 수선 등을 노인들에게 맡긴다.

노인 인구가 많은 일본도 74년에 만들어진 ‘중고령자 고용촉진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민간기업의 경우 전체 종업원수의 6% 이상을 60세 이상 고령자로 채우도록 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공기업은 33개 직종에서 노인 의무고용률을 지켜야 한다. 경비원의 75%, 청소원의 70%,우편배달원의 35% 이상이 노인이어야 한다.

60세 이상 인구가 20%를 넘는 프랑스. 은퇴자들은 국민연금으로 기본적인 생계문제를 해결하고 지방자치단체가 마련한 각종 여가 프로그램을 즐긴다. 매년 7월부터 10월까지 각 대학에서는 은퇴자를 위한 유료 또는 무료 취미교실이 열린다. 대학 강의도 청강할 수 있다. 65세 이상 노인은 오페레타 연극 서커스 축제에 무료 입장한다.

최근 여론조사기관 소프르의 설문조사 결과 은퇴자 10명 가운데 7명꼴로 이런 응답을 했다. “나는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은퇴후 나는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이진영기자〉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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