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 리그 (28)

입력 1998-11-20 18:59수정 2009-09-24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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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 ⑤

1987년은 1월부터 술렁거렸다. 3월에는 폭로가 있었고 4월에는 끓는 물주전자의 주둥이를 봉합하려는 무모한 시도가 있었다. 5월은 한 달 내내 거리가 시끄러웠다. 6월로 접어들자 절정을 이루었다. 사무실이나 식당, 술집 어디를 가든 월급쟁이들의 화제는 비슷했다. 내가 근무하는 광고회사가 시내 한복판인 태평로에 있었으므로 나는 시위대와 자주 마주쳤다. 물론 일부러 가까이 간 일은 한번도 없었다.

입사동기 중에 유난히 의로운 체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는 신문지로 파리 한 마리 죽인 것을 두고도 ‘탁 치니 억 하더라’며 제 행동에 정치적 해석을 붙이곤 했다. 회람을 받으면 ‘이거 보도지침 아냐?’라고 시사적인 발언을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특히 내게 연대의식을 강요하곤 했는데 내가 자기처럼 재수를 거쳤고 입사동기일 뿐 아니라 같은 개띠이기 때문에 정서가 비슷하다는 거였다.

그는 늘 개띠임을 내세웠다. ‘남의 살’로는 맛에서 개를 따라올 고기가 없다는 둥 개가 아이큐가 높고 기억력이 좋다는 둥 ‘오수’라는 지명의 유래를 아냐는 둥. 어떤 때는 개띠 아닌 개 숭배자로까지 보였다. 오줌 눌 때 한쪽 다리를 쳐들거나 혓바닥을 늘어뜨리거나 혹은 손으로 붙잡지 않고 그냥 누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알고 보니 그가 개띠를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음력 섣달에 태어난 그는 나와 띠는 같지만 양력으로 치면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나이에서 꿀리지 않기 위해서는 띠를 앞세워야만 했던 것이다. 그의 개타령을 듣기 싫어하는 동료 하나가 그 사실을 알고 주민등록증 대조를 요구했다. 하는 수 없이 주민등록증을 내놓긴 했지만 그는 이번에는 호적이 잘못된 거라고 바득바득 우겼다.

나는 나이 따위가 인간의 서열을 매기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할 만큼 불합리하고 주정(主情)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 살 어리다는 걸 안 뒤부터는 그의 설치는 모습이 더욱 건방지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것 중의 하나가 되기를 거부하는 나에게 백만 명이나 되는 졸업정원제 세대에 유대감이 있을 리 없었다.

창의적이고 재능 있는 사람이 다 그렇듯이 조직생활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사원 연수에 단골로 불려 다니는 어떤 강사들은 제2의 가족이니 평생 직장이니 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했지만 직장은 어디까지나 직장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만약 자동차 부품 3만 개 중 하나로서 적당히 헐겁게 붙어 있다가 정년을 맞을 수 있었다면 분명 나는 개타령 따위는 무시했을 것이다.

나는 불합리한 규칙과 부당함, 편법 따위에 그런대로 적응할 수 있는 철든 인간이었다. 윗사람들의 잔소리가 성가시긴 했지만 폭풍우가 지나갈 때처럼 외투깃을 꼭 붙들고 잠시 고개를 숙이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피라이터라는 직업은 그런 게 통하지 않았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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