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이너리그 (22)

  • 입력 1998년 11월 13일 18시 49분


국상(國喪) ①

1979년 10월 26일. 우리는 새벽 6시에 서울역에서 만났다.

첫 번째로 도착한 것은 나였다. 배낭을 내려놓고 시계탑을 올려다보니 출발시각까지는 5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푸르스름한 새벽 어스름 속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보고 있었고 발밑에도 여기저기 신문이 굴러다녔다. 호외인 모양이었다. 집어서 보려는데 조국의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다. 야, 김형준! 지금 출발해. 빨리 뛰어!

언제 왔는지 승주와 그리고 여자 둘도 개찰구를 향해 뛰고 있었다. 기차는 우리가 타자마자 출발했다. 자신의 낚시가방과 승주의 기타를 선반에 올린 조국은 동터오는 차창 밖을 한 번 내다보더니 안심한 듯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다음 내게 물었다.

유고(有故)가 무슨 뜻이냐? 글세, 톨스토이의 미발표 소설이라도 발견됐나? 승주가 여자들을 소개하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다.

―자, 여기는 의상학과 3학년 한미영 씨고, 여기는 미영씨 기숙사 룸메이트야. 이름이….

―저는 이운총이라고 해요.

그렇군. 이름이라도 특이해야 겠지… 나는 마음속으로 논평했다. 혹시 다음에 만나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평범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날 우리가 간 곳은 서정리라는 이름의 낚시터였다. 낚시는 조국 혼자 했고 승주는 물가에서 여자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다가 신중하게 낚시밥을 노리는 물고기의 정신집중에 방해된다 해서 멀리 억새숲으로 쫓겨났다. 그리고 나는 투덜거리는 틈틈이 밥을 지었다. 운총이 곁에서 도왔는데 칼을 신문지로 잘 싸두어서 찾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식이었다. 차라리 혼자 하는 편이 나았으므로 나는 가서 물이나 떠오라고 시켰다. 어디서요? 운총이 물었다. 그거야 저도 모르죠.

운총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코펠을 들고 미영 쪽으로 갔다. 조금 뒤 두 여자는 손을 맞잡고 마을 쪽으로 떠났다. 마을은 생각보다 멀었다. 이마에 땀이 맺힌 운총이 물이 가득 담긴 코펠을 내게 건네주었다. 빈손으로 따라갔다 오기만 한 미영은 ‘너무 힘들었어요’라며 주먹으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승주가 손수건을 꺼내 미영의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운총의 스웨터 앞자락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밥을 안친 뒤 내가 남은 물을 버리려고 하자 승주는 깜짝 놀라는 시늉을 했다. 미영씨가 떠온 건데 어떻게 버려, 라며 코펠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마시는 것이었다. 물은 아주 조금밖에 줄어들지 않았지만 여자의 마음을 적시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조국이 미영에게 낚시를 가르쳐주었다. 그러는 동안 운총은 어떻든지 쓸모있는 물건이되고 말겠다는 표정으로 쭈그린 채 버너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유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그때 물가 쪽에서 여자의 환호가 들려왔다. 어머, 잡혔어! 내가 잡았어, 내가! 조국이 뒤에서 잡고 있는 긴 낚시대의 앞쪽을 살짝 쥐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여자는 거기 꿰인 물고기 못지않게 퍼덕거렸다.

<글: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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