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벌거벗는 통신비밀

  • 입력 1998년 10월 16일 18시 51분


우리는 지금 도청(盜聽)무방비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나 있었던 악습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수사기관이 중대범죄의 경우 부득이할 때 법원허가를 받아 통신내용을 엿듣는 감청(監聽)을 남용하고 있고 일반인간에도 불법도청이 성행해 공포감을 가중시키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국회에 낸 자료에 따르면 특히 현정부 들어 감청영장 청구건수가 급증했다. 인권선진국을 지향한다는 다짐이 무색할 정도다.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는 헌법에 보장된 기본적 인권의 하나다. 이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실현하는 데 필수조건이다. 헌법이 국가안보상의 필요 등 예외적 경우에만 기본권에 제한을 가할 수 있게 못박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기초한 통신비밀보호법은 범행저지 범인체포 증거수집 등 수사상 필요에 의해 감청을 실시할 경우 엄격한 법절차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이 역설적으로 ‘통신비밀침해법’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걱정이다.

수사기관들의 감청영장 청구는 올들어 8월까지 2천2백89건에 달했다. 48시간내에 법원의 사후허가를 받는 긴급감청은 올들어 6월까지 6백39건, 이중에 결국 영장을 받아낸 경우는 3백12건에 불과했다. 감청이 중지되더라도 48시간 동안은 사실상 감청이 가능한 것이 문제다. 특히 올들어 6개 통신업체가 협조요청받은 감청은 3천5백80건인데 비해 영장청구는 2천2백89건에 그쳐 1천2백91건이 불법감청의 의혹을 받고 있다. 불법감청의 길이 폭넓게 열려있을 뿐만 아니라 합법을 가장한 감청의 남용도 막기 어려운 실정이다. 감청을 피하기 위해 감청방지 전화기를 놓고 중요한 얘기는 아예 공중전화를 이용하거나 직접 만나서 해야한다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감청의 남용을 막으려면 법원이 통제기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한다. 수사기관 스스로 감청을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최종적으로 법원이 철저하고 실질적인 감독권을 행사해야 한다. 그 기능을 못한다면 오늘날과 같은 통신시대에 인권은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다. 감청의 경우 수사기관은 백지위임을 받아놓은 상태와 같다. 법원의 제대로 된 감청영장 심사와 통제가 가능하도록 필요하다면 법개정도 검토해야 한다. 불법감청을 한 수사기관은 법대로 무거운 형사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다 첨단 도청장비의 손쉬운 구입이 일반인간 도청을 부채질하는 만큼 유통과정을 철저히 단속하고 불법도청자를 가려내 엄단해야 한다. 수사기관이나 일반인이나 도청의 유혹을 자제할 줄 모르면 결코 선진사회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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