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살신성인 119대원

  • 입력 1998년 10월 2일 18시 11분


난세(亂世)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던가. 지금 우리는 전례없는 경제위기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정쟁으로 허송세월하는 정치권에선 사정과 지난해 대선 때의 ‘판문점 총격요청’설을 놓고 삿대질이 어지럽게 오간다. 그 어수선함 속에서 한가위를 맞는다. 여름 내내 잠잠하던 태풍마저 추수철 남녘들판을 때리고 달아날 것은 뭔가. 그러나 태풍 얘니는 ‘작지만 큰 영웅들’의 이야기를 남겼다.

▼지난 1일 대구 금호강에서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다 보트전복으로 희생된 119대원 이국희(44) 김현철(28) 김기범씨(26). 이들은 부모가 7년간 지성 드려 낳은 독자이거나, 부인 여섯살짜리 아들과 함께 1천만원짜리 전셋집에서 살아왔거나, 5년간 사귄 애인과 내년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가족에게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지난 여름 수마(水魔)현장에서 스러진 이정근 이내원 장순원대원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생명을 구하려다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긴 것은 하필 119대원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희생정신이 몸에 배어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부터 살고 남보다 더 가지려는 탐욕으로 가득찬 난세에 이들은 빛을 던진다. 부끄러움을 안겨주는 사회의 소금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들이 남긴 ‘작지만 큰 영웅들’의 이야기를 길이 알리고 교육하는 일이나마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 사회는 숭고한 희생을 영웅시하다가도 그때뿐이다.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는 건망증 사회다. 다른 가족의 희생은 겉으로 찬양하면서 내 가족의 희생은 원치 않는 표리부동 이중인격 사회이기도 하다. 당국도 1계급 특진과 훈장, 금일봉을 쥐어주고 나면 끝이다. 작은 영웅들은 훈장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희생이 길이 기억되는 것만으로 족하다.

육정수<논설위원〉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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