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 (66)

  • 입력 1998년 10월 2일 17시 20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 ⑨

―너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나 나에 대한 눈꼽만큼의 예의가 있다면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말해.

호경은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음성은 평소 보다 약간 더 울적할 뿐이었다.

―누군지 말할 수 없어. 제발 묻지 마.

―그래? 그럼 다른 것을 물을까? 얼마나 된거야?

―5개월.

처음엔 마치 장난처럼 그의 손바닥이 나의 얼굴을 힘없이 한번 두드렸다. 그리고 두 번째엔 조금 더 세게 쳤다. 세 번째엔 악력이 가득했다. 네 번째엔, 그는 단단하게 쥔 주먹으로 권투선수가 다른 권투 선수에게 공격하듯 나의 가슴을 올려쳤다.

나는 얼굴을 바닥에 부딪치면서 쓰러져 버렸다. 호경은 쓰러진 나의 목 위에 구둣발을 올리고 누르기 시작했다.

그가 발에 힘을 줄때마다 얼굴에 방파제의 거친 시멘트 바닥이 파고들어 상처를 내었다. 그는 나의 목에서 발을 치우고 쓰러져 누운 내 곁에 앉았다. 그리고 침착하고 울적한 음성으로 다시 시작했다.

―어떤 새끼야? 말해! 말 안하면 죽여버릴 거야.

거의 한 시간 동안 그런식으로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나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가 나를 죽일 만큼 나에 대한 절대적인 어떤 의미가 남아 있었던가. 우린 서로에게 어떤 의미이기에 아직도 이토록 치명적인가? 사랑인가, 소유인가, 명예인가. 사랑을 잃고 그토록 무표정하게 살아 온 우리의 삶, 이미 서로의 순결이 훼손되어버린 뒤에도 무엇이 남아 있어서 이토록 힘이 드나? 그에게 이런 아픔을 느낄 열정이 아직도 남아 있었던가. 그가 주먹으로 치는데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은 가짜 같았다. 그리고 살의를 불러일으키는 그 열정의 정체도 의심스러웠다.

어떤 이유로든 호경이 나를 죽이고 싶은 열정이 진심이라면 기꺼이 그의 손에 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추상적이었다. 그는 바람난 아내의 현장을 덮친 익명의 남편의 역할을 맡아하고 있을 뿐인 것 같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다. 그의 분노마저 신뢰할 수 없었다.

―말 해, 왜 말하지 않는 거야?

그는 나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잉크빛 밤하늘의 별들이 모두 내 눈 속으로 들어올 때까지….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나를 죽일만큼 고통스럽다면 죽여도 좋아…. 그가 손을 놓자 나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의 손과 검은색 모직 원피스와 발등에 구토물이 흘렀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차를 세우고 나를 다시 끌어내렸다. 공교롭게도 부희의 집 앞이었다. 호경은 나를 집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커트를 걷어 올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그가 주먹을 쥐고 나의 얼굴과 몸을 때렸다. 더러운 년, 창녀 같은 년…. 모든 것이 꿈 같아서 아프지도 않았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이 낯선 마을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왜 아직 함께 있는가.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그가 걷어차는대로 흙바닥을 뒹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육체의 아픔 보다는 다치고 있을 호경의 마음이 더 가슴에 사무쳤다. 흡사 참수 당한 호경의 목을 치마 속에 싸안고 뒹구는 것만 같이. 호경 역시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고 있지 않았다. 그 역시 일생에서 가장 슬픈 날처럼, 일생의 마지막 날처럼 절망적으로 솜방망이 같은 주먹을 휘둘렀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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