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오세정/연구중심대학으로 가는 길

  • 입력 1998년 8월 25일 19시 44분


최근 서울대를 비롯한 소위 일류 대학들이 연구중심대학으로의 발전을 표방하며 앞다투어 입학생 선발 방법과 학제(學制) 등에 대한 대폭적인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사실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이 필요함은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던 사항이며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상황 속에서도 늦춰서는 안될 과제다.

오히려 이번 경제위기가 국경 없는 경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창의력 있는 고급인력 양성이 급선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므로 금융개혁 재벌개혁에 못지 않게 교육개혁 또한 시급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 도전-창조정신이 우선 ▼

이런 의미에서 정부가 국가재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제수준의 연구중심대학을 육성하기 위해 상당한 지원을 계획하고 있음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논의되고 있는 연구중심대학 육성방안은 졸속으로 추진되어서인지 그 방향이 잘못된 점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모든 대학이 ‘연구중심대학〓재정지원’이라는 등식에서 출발하고 있는 점이다. 물론 연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상당한 재정투자가 필요하고 특히 이공계에서 첨단기자재의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첨단 연구를 하는 것은 기자재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기자재가 좋더라도 기존 관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으면 세계적인 연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돈으로 연구중심대학을 세울 수 있다면 오일 달러로 최첨단 시설의 대학들을 세운 중동 산유국(産油國)들이 이미 세계 수준의 명문 대학 몇개쯤은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전과 창조의 정신 없이는 지금 서울대에 미국 하버드대 수준의 재정지원을 한다 해도 곧 연구중심대학으로 바뀌지는 못한다.

이같은 물량 위주의 발상은 대학원 중심 대학을 만들기 위해 학부 정원을 줄이고 대학원 정원을 늘린다는 계획에서도 드러난다.

대학원 학생을 늘린다고 해서 곧 연구가 활성화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학부의 부실을 대학원으로 옮겨 놓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의 소위 명문대학에서는 교수 수에 비해 지도해야 할 대학원생 수가 너무 많아 연구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대학원생 수를 줄여야 심도 있는 연구와 질 좋은 고급인력 양성이 이뤄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 인력의 대폭적인 증원 없이 대학원생을 늘리는 것은 함량미달의 고급 실업자만 양산하는 길이며 우리 대학의 고질인 외형위주 성장주의의 표본이다.

더욱 답답한 일은 아직도 많은 대학이 ‘서울대 따라하기’에 급급하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연구중심대학은 각자 특색을 가지고 기존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성공할 수 있다.

미국의 스탠퍼드대나 칼텍이 대표적인 예이며 일본의 교토(京都)대도 도쿄(東京)대와의 차별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렇게 자기 대학에 맞는 모형을 개발하려는 노력 없이 서울대가 한다고 자신들은 한번도 시도하지 않던 무시험 입학제를 전면 실시한다거나 충분한 검토도 없이 세계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2+4학제의 도입을 추진하는 것은 차라리 무책임하다.

이같이 뒤따라가는 자세로는 영원히 2류에 머물 수밖에 없으며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중심대학으로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가 현 시점에서 연구중심대학이 필요한 이유는 다양한 방면에서 독창성 있는 인재를 길러내 21세기의 무한경쟁시대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 대학 차별화전략 필수 ▼

그러나 지금처럼 내실보다 외형 위주로 계획이 세워지고 남의 뒤나 따라가서 대학별 다양화와 특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도 연구중심대학 육성계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연구중심대학의 성패는 창조적인 인재에 달려있음을 직시하고 기득권과 권위의식에 젖은 대학의 분위기를 쇄신하여 젊은 학생과 연구자들이 마음껏 능력을 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도 단순한 제도개편 차원을 넘어 이러한 분위기 조성에 일조(一助)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오세정<서울대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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