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예종석/퇴출기업 선정과 과제

  • 입력 1998년 6월 18일 19시 58분


드디어 살생부가 개봉되었다. 55개 퇴출기업의 명단이 발표되고 그 기업들은 대 멕시코전때의 하석주 선수처럼 퇴장을 강요당하고 있다.

명단에는 과거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으로 영광을 누렸던 업체도 있고 그 기업의 인수사실이 신데렐라의 탄생으로 보도되던 그런 기업도 있다.

명단 발표를 들으면서 퇴출당하는 기업의 장래도 걱정스럽거니와 국민의 입장에서도 우려와 의문을 금할 수 없었다.

퇴장당하는 하석주선수도 할 말은 있었고 바라보는 국민은 더욱 할 말이 많았던 것처럼 말이다.

▼ 공정-형평성 의문남아 ▼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는 건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55개 퇴출기업이 갖고 있는 부실 채권 17조원은 누가 꾸어주었는가. 그것은 누구도 아닌 은행을 포함한 금융권이다. 또 그 은행들은 정부의 감독을 받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대출을 허락하고 방조한 정부와 은행이 퇴출을 심사하고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합당한 일인가. 두번째는 그 짧은 기간에 부실기업 판정심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난달 10일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이 5월말로 부실기업 정리시한을 못박은 뒤 한달 남짓의 기간이 지났을 뿐이다.

법정관리와 화의를 신청한 기업의 판정에도 보통 몇개월이 소요되는데 그 짧은 기간에 그 많은 기업에 대한 심사가 제대로 이루어졌을지 의문이다.

셋째는 형평성의 문제다. 은행의 기업 회계자료를 기준으로 판정을 했다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은 우리 기업의 회계자료 자체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추적할 수 없는 내부자 거래로 회계자료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 놓은 기업은 명단에서 제외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경우 “왜 우리만 나가야 하느냐”는 항변은 피할 수 없다.

퇴출 기업의 결정과정도 의문 투성이이지만 향후의 문제는 더욱 걱정스럽다.

퇴출기업은 그 퇴출 과정에서 많은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것이다.

우선 퇴출기업과 거래하던 기업의 자금난을 가중시킬 것이며 그것은 중소업체의 연쇄부도로 이어질 것이다.

또한 퇴출기업과 거래하던 금융기관의 여신 중단은 물론 금융기관간의 자금공급중단도 충분히 예상되는 어려움이다. 퇴출기업의 선정이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불러와서는 결코 안된다.

또 한가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실업자 문제다. 구조조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실업자를 바라보는 가족이나 이웃의 얼어붙은 마음을 쓰다듬어주는 정부의 배려가 필요한 때다.

퇴출기업의 선정은 환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이며 수술은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실기업의 퇴진은 건전한 기업의 지원을 전제로 하여 우리 경제를 회생시키는 전환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향후 계속될 퇴출 작업도 그러한 관점에서 죽이기보다는 살리기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이 기회에 금융기관의 기업평가기능을 일상화하여 금융관행 선진화의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제 구조조정은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유사 이래 어느 정권이든 집권 초기에는 개혁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많은 경우 실패로 돌아갔다.

대부분 단기적인 업적에 집착하여 서둘렀기 때문이다. 실패의 사례는 역사를 들먹일 것도 없이 바로 전 정권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 이전의 정권들도 예외일 수 없다.

▼ 실업자 최소화 노력을 ▼

최근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졸속이라도 빨리 개혁을 추진하라 촉구했다고 한다.

구조조정이 늦다는 외국의 압력을 얼마나 느꼈으면 그런 발언이 나왔겠는가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졸속은 안된다.

아무리 급하고 상황이 어렵다 하더라도 짚을 건 짚고 가야 한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는 위험하다. 오늘의 경제난국도 따지고 보면 지난 30여년간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 경제의 체질 탓 아닌가. 어느 외국인 투자분석가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 경제는 죽음의 고통과 대치하고 있다. 개혁은 국민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탈출구다. 신중한 개혁을 바란다.

예종석<한양대교수·경영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