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⑭/영화제작]『평가는 관객의 몫』

  • 입력 1998년 5월 21일 19시 26분


수준급의 스케치 솜씨를 뽐내는 ‘우아한 대도(大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예술같은 솜씨로 대저택만을 골라 턴다. 어느날 밤 미국 대통령의 후원자 집에 잠입했다가 못 볼 것을 본다. 대통령(진 해크먼)이 그집 부인과 뜨거운 정사를 벌이는 장면과 대통령 경호원이 그녀를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한 것.

나쁜 대통령의 모습을 그린 영화 ‘앱솔루트 파워’의 초반부 장면이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대통령은 썩 좋은 소재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에어 포스 원’처럼 대통령을 좋게 표현한 영화가 있는가 하면 대통령을 마피아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그린 영화도 많다. 올들어서만 빌 클린턴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을 다룬 영화 두편이 잇따라 개봉됐다.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서 꿈을 만드는 재료는 제한이 없다. 대통령과 함께 연방수사국(FBI) 중앙정보국(CIA) 등 권부도 좋은 재료가 된다.

할리우드에서 충무로로 카메라를 돌리면 완전히 딴 세상이 찍힌다. 대통령은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검찰 안기부 국세청 국회의원 경찰 등 권력기관은 물론 변호사 종교인 의사 언론인 등 여론주도층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소재다.

작년에 개봉된 구성주감독의 멜로극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는 한동안 개봉이 보류됐다. 여주인공인 미혼모 오난희(양정지)가 남주인공인 수(김갑수)에게 던진 농담 한마디 때문.

난희의 뒤를 쫓아온 수는 난희가 아이와 함께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다. 이 때 난희가 수를 놀려주려고 태연하게 던진 한마디. “이 아이의 아버지는 김영삼씨인데 지금은 대통령이에요…사실은 김대중씨 아들이에요.” 여주인공의 심리상태를 드러내고 영화의 극적인 반전을 위한 대사였다. 등급심의 과정에서 심의위원들은 “일반적인 국민정서에 어긋난다”며 통과시키지 않았다. 결국 이 장면은 삭제됐다.

우리 영화는 검열 속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왔다. 정치 사회적인 민주화 바람 속에서도 유지되던 검열은 작년 10월에야 공식 철폐됐다. 그러나 검열의 주체인 공연윤리심의위원회(공륜)가 등급심사를 하는 공연예술진흥협의회로 바뀌었을 뿐 검열은 사실상 살아있다. 등급을 주지 않고 제작진에게 ‘당신들이 알아서 고쳐오시오’라고 언질을 주는 방식으로 ‘문제’장면을 빼도록 한다는 것.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영화에 대해 어느 국가에서든 심의를 한다. 다만 영화 심의의 세계적인 흐름은 검열이 아닌 등급분류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선진국의 경우 유해한 영화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화인 학부모 언론인 등으로 구성된 단체가 등급을 분류한다. 지나친 폭력과 성행위 등을 문제삼는 경우는 있다. 이 때도 작품이 손상되지 않도록 지켜준다.

영화는 글로벌시대의 히트상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공원’은 9억1천4백만달러(약 1조3천억원)를 벌어들였다. 자동차 1백50만대를 수출한 것과 맞먹는다. ‘타이타닉’은 13억달러(약 1조8천억원)를 벌어들였다. 작년 한해 동안 할리우드의 매출고는 1백25억달러(약 17조9천억원).

할리우드의 성공 뒤에는 막대한 제작비와 함께 제작진의 자유로운 사고가 있다. ‘이건 다룰 수 없어’라는 말은 할리우드에서 들을 수 없다. 제작진은 오로지 관객들만 의식할 뿐이다.

충무로와 할리우드의 거리는 멀다. 충무로는 인력 노하우 자금이 모두 약하다. 게다가 권력층과 이익단체들로부터 받는 유무형의 압력으로 소재선택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형식이든 영화에 대한 검열은 감독들의 창작의욕을 꺾는다. 검열에 한두번 당해본 감독들은 시나리오 작성단계에서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그 섬에 가고 싶다’ ‘그들도 우리처럼’을 만들면서 검열에 시달린 박광수감독의 말.

“비무장지대 초소 군인들의 이야기를 구상중입니다. ‘국방부가 허가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 들려 구상이 한발짝도 진전되지 않아요. 감독들은 영화를 찍으면서 ‘이 장면이 잘리지 않을까’하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레퀴엠’에서 죽은 처녀와 주인공의 성행위 장면을 스스로 잘라낸 구성주감독은 마음이 편치 않다.

“심의에서 문제가 될 것이란 제작진의 지적 때문에 미리 삭제했어요. 극전체 흐름에서 이 장면은 핵심이라서 참 아깝습니다. 영안실 시체지기인 주인공은 망자(亡者)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죠. 그 역할의 하나로 성행위장면이 들어간 건데….”

〈이희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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