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⑫]적대적 M&A?

  • 입력 1998년 5월 7일 20시 05분


▼ M&A란 ▼

둘 이상의 기업이 하나로 통합되어 단일기업이 되는 기업합병(Mergers)과 한 기업이 자산 또는 주식을 취득해 다른 기업의 경영권을 획득하는 기업인수(Acquisitions)를 말한다.

서로 필요에 따라 합의하에 이뤄지면 우호적(Friendly) M&A, 기존경영진의 반대를 꺾고 인수하면 적대적(Hostile) M&A라고 한다.

지난해 3월11일 전경련회관 2층 회장단회의실. 최종현(崔鍾賢)전경련회장과 정몽구(鄭夢九)현대 김우중(金宇中)대우그룹회장 등 재벌 총수들이 굳은 얼굴로 속속 모였다.

대농그룹 주력회사인 미도파 주식을 사들인 신동방그룹이 미도파에 경영권을 내놓을 것을 요구한 ‘사건’ 때문이었다. 대농의 최고경영자는 전경련 회장단 중 ‘맏형’격인 박용학(朴龍學)명예회장. 총수들 사이에는 ‘박회장을 돕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 회의 후 손병두(孫炳斗)부회장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출자 및 소유제한 규제들에 묶여 대기업들의 경영권 방어능력은 한계에 달했다. 당사자간 합의에 의한 우호적 인수합병(M&A)은 필요하지만 경영권 탈취나 주식시세차익을 노린 적대적 M&A에 대해서는 전경련이 개입해 경영권을 보호해야….”

한국 재벌들의 적대적 M&A에 대한 뿌리깊은 우려와 방어심리가 확인된 순간이었다. 재벌들이 평소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자유시장 질서’에 어긋난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전경련의 결정은 당장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신동방의 우군을 자처했던 성원그룹이 등을 돌렸고 미도파 주식매집에 나섰던 외국투자가들은 주식매입을 중단했다.

김&장 법률사무소의 전성철(全聖喆)변호사는 작년에 시작된 외환위기에 재벌들의 ‘동료의식’도 한몫했다는 해석을 한다.

“사들일 만한 한국기업을 소개해달라는 외국기업의 요청이 그날 이후 급격히 줄었다. ‘자유거래’를 소리높여 외치던 재벌들이 똘똘 뭉쳐 M&A를 봉쇄하는 것을 보고 외국인들은 질린 듯했다.

대농은 전경련 지원 덕택에 경영권을 지켜냈다. 그러나 방어용 주식을 사들이는데 1천억원 이상을 무리하게 쏟아부은 탓에 결국 그룹 자체가 공중분해됐다.

M&A 개념이 90년대초에 한반도에 알려졌지만 ‘기업도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란 기본의식조차 약한 게 우리 현실이다. 외국은 어떨까. 전세계 M&A 금액은 96년 이미 1조달러를 넘어섰다. 경영전략상 필수적이면서도 일상적인 ‘거래’의 하나로 인정받는 추세다.

한국처럼 기업을 사고파는 거래가 무척 드문 독일. 지난해 초 독일내 두번째 철강업체인 크루프는 선두 티센을 공개매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으려는’ 시도였다. 티센은 적정한 인수가격을 제시한 크루프의 요구를 선선히 들어줘 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덕택에 크루프는 일본의 신일본제철, 한국 포항제철에 이어 세계 3대 제철기업으로 떠올랐다.

미국에선 경영권을 노린 공격자가 나서면 수비측에선 방어비용과 ‘항복’하고 주식을 넘겨줄 때 얻는 돈을 비교해 주주에 이익이 되는 방식을 선택하는 게 보통. 그래서 적대적 M&A는 흔치않고 대부분이 우호적 M&A로 결말이 난다.

미국 3대 공중파방송인 NBC를 소유했던 RCA. 85년 미국 발전설비업체인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전격적인 인수시도에 휘말렸다가 한달만에 무리한 방어를 포기하고 GE의 자회사로 변신했다.

주주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필요에 따라 기업을 사고 파는 M&A시장이 활성화된 외국에선 늘 굵직굵직한 M&A뉴스로 들썩인다. 시티은행의 지주회사인 시티코프와 트래블러스그룹간 합병,세계적 자동차메이커인 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추진 등도 최근의 일.

일본도 M&A 육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일본 최대의 의약품 유통업체간, 유력은행간 합병발표로 일본 열도가 떠들썩했던 것이 지난해. 일본 정부는 독점관련 규정을 완화하고 지주회사 설립도 허용, M&A시장을 통해 일본경제의 부활을 꾀한다.

적대적 M&A는 초창기엔 미국에서조차 ‘권장할 만한’ 거래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 적대적 M&A기법으로 한해 동안 5억달러를 벌어들인 마이클 밀켄은 증권거래법 위반으로 철창에 갇히기도 했다.

고수익 고위험채권(정크본드)발행으로 인수자금을 조달하는 밀켄의 M&A 수법은 미의회 청문회까지 올랐다. 조사결과는 뜻밖에도 ‘적대적 M&A는 필요악’. 미의회는 경영실적이 악화된 기업을 사들여 비싼 값에 되파는 레이더스(기업사냥꾼)들이 본의야 어떻든간에 결과적으로 기업 효율성을 최고로 끌어올린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 이후 국내 M&A관련 규제는 ‘혁명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M&A시장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가는 것이다. 하지만 기업들과 사회 전반의 M&A 의식은 아직도 세계표준을 거부하는 모습이다.

90년대 들어 국내에도 M&A업무 담당팀이 증권사 종금사를 시작으로 수십개 생겨났다. 그러나 독립 중개업체(부티크) 외엔 적대적 M&A업무는 가급적 피하는 게 우리 현실. 이승현(李承鉉)이강파이낸스 상무는 “아직도 적대적 M&A라면 ‘쓸데 없는 짓들 한다’고 욕하는 기업인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우리기업들이 세계적 흐름에 무리없이 적응하는 지름길은 무엇일까. 30년 가업을 반년여의 다툼끝에 지난해 사보이호텔에 내준 김홍건 신성무역회장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우리 기업 풍토가 먼저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평생 가꾼 회사인데…’라는 식의 아집이 ‘눈을 멀게 만든다’는 것.

S증권 M&A전문가는 “미국기업 사장보다 권한이 훨씬 강한 한국기업 사장들은 경영권을 놓치면 피해가 크기 때문에 주주이익을 무시하고 경영권 방어에 매달린다”고 지적했다. 성숙된 M&A를 가로막는 걸림돌은 다름 아닌 한국적 기업운영체제라는 분석이다.

〈박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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