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선비론(22)]백암 박은식

  • 입력 1998년 3월 12일 19시 47분


19세기말 국가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같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었던 조선 망국기(亡國期)의 지성들은 조국의 앞날과 자신의 생존이라는 갈림길에서 격심한 갈등과 좌절에 직면했다. 조국을 위한 선택이라고 스스로 변명해도 결과적으로는 친일파로 전락하기도 하고 자신과 가정이라는 소아(小我)를 지키려는 처세는 망국 지식인으로서 치욕적인 삶을 감내해야 하는 고통을 동반했다.

조국을 구하고 자신도 살아남기 위한 방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양자를 비교적 슬기롭게 조화시킨 대표적 지성중의 한사람이 바로 백암 박은식(白巖 朴殷植·1859∼1925년)이다.

그의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태어나면서부터 26세(1884년)까지의 성장기이다. 그는 1859년 9월30일 황해도 황주에서 서당 훈장 용호(用浩)씨와 노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세부터 17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성리학의 경전과 제자백가를 섭렵하여 유자(儒者)로서의 기본 교양을 쌓았다.

26세에 평안도 태천의 명유 박문일(朴文一)을 찾아뵙고 사제관계를 맺었다. 박문일은 경기 양평에 은거하던 유림(儒林)의 영수 이항로(李恒老)의 제자로 동생 박문오(朴文五)와 함께 서북지방의 대표적 학자였다. 젊은 시절 스승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세뇌와 감화는 다채롭게 변화해간 그의 인생 역정에도 불구하고 조선 선비의 지조를 지켜낸 버팀목이 아니었을까.

제2기는 27세(1885년)때 향시에 합격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미관말직에 그쳤고 발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자신의 진로를 탐색하던 39세(1897년)까지의 모색기이다. 이 시기에 그는 다양한 지적 편력을 통해 학문을 축적하고 내실을 다져 미망(迷妄)의 세월에 대비했다.

제3기는 불혹의 40세(1898년)부터 나라가 망하는 52세(1910년)까지의 사회운동기이다. 이 시기 그는 일전하여 주자학도의 껍질을 벗고 계몽운동가로 변신했다. 40세의 장년으로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교육문화 개혁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갔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면서 서우학회 서북학회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그의 활동은 당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던 서북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서우(西友)’1호에 쓴 ‘오늘날 새로운 문화의 개신은 반드시 서로(西路)로부터 창시하리라’는 사설에 서북인의 자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제4기는 53세(1911년)부터 세상을 떠나던 67세(1925)년까지의 결실기이다. 이 시기야말로 박은식 생애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는 국망(國亡) 이듬해인 1911년 만저우(滿洲)로 망명, 그곳을 우리민족의 활동무대로 상정한 일련의 저술을 했으니 동명성왕 연개소문 대조영 등 고대사의 여러 인물들을 재조명하는 작업들이었다.

1915년 ‘한국통사(韓國痛史)’를 펴내고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집필작업을 병행해 1920년 간행했다. 1925년 3월엔 의정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돼 취임했다. 그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두는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해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1925년11월1일 67세로 별세했다.

그의 대표적 저술이 ‘통사’와 ‘혈사’의 이서(二書)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통사는 대원군시대부터 한일합방까지 50여년의 뼈아픈 망국사로, 국가는 비록 망하였지만 국혼(國魂·국가의 정신적인 힘)인 국교 국가 등을 보존하고 교육과 독립투쟁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결국 국백(國魄)인 국가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비판없이 긍정하고 있는 것이 애국계몽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가 추구한 독립운동의 기본 방향을 읽을 수 있다.

‘혈사’는 글자 그대로 피로 쓴 독립운동사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고무되어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까지의 독립투쟁사를 서술했다. 민족주의 역사학자로서 역사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의 이론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그가 신념을 갖고 설파한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은 양명학으로 유교를 개혁하자는 주장.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성리학은 더이상 시대정신의 기능을 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간단명료한 심학(心學·마음 공부)을 지향하며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종지(宗旨)로 한 양명학으로 유교를 근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대동교(大同敎)를 창시해 유교적 이상사회인 대동사회를 제시하고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투쟁적인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인류가 공존하는 신문명을 희구했다.

박은식은 “19세기와 20세기는 서양문명의 시기요 21, 22세기는 동양문명이 크게 발달할 시기”라고 갈파했다. 그는 암울한 시대에 소년(당시 그의 죽음을 애도한 동아일보 사설 부제가 ‘다시 못볼 이 노소년’이었다)처럼 꿈과 이상을 잃지 않고 망국에 상심하던 이들을 위무하며 한줄기 빛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태백광노(太白狂奴)’니 ‘무치생(無恥生)’이니 하여 자신을 비하하기도 했다. 태백산, 즉 백두산이 있는 나라의 사람으로 망국을 슬퍼하며 미쳐서 돌아다니는 노예로 자처(태백광노)하고 나라를 잃고도 살아있으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무치생)이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고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1993년 우리 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그의 유해를 모셔와 국립묘지 임시정부 묘역에 안장함으로써 박은식은 비로소 광복 조국의 품에 돌아왔다.

정옥자<서울대교수·한국사>

▼약력

△서울대 사학과 졸업 △서울대대학원 박사학위 △저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사' '조선후기 지성사'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역사에세이'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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