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話 문민정부⑭]「성역있는 司正」 동화銀 비자금 수사

  • 입력 1998년 2월 8일 20시 48분


“누구라도 잡아넣으라”는 김태정(金泰政)대검찰청 중수부장의 불호령이 떨어진 93년4월 중순 서울 서소문 구(舊)대검청사 1023호. 대검 연구관 함승희(咸承熙·현 변호사 개업)검사는 92년2월에 작성한 정보철을 뒤적거리다 눈이 번쩍 띄었다. ‘동화은행장 연임에 말썽, 직원들을 시켜 시중백화점 호텔에서 영수증을 대량으로 모으게 한다고 구설수.’ 함검사의 입에서는 “바로 이거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큰 것이 터질 수 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은행장이면 대출커미션만 받아도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말단 경리직원처럼 허위영수증으로 원시적인 경리부정을 한다면 뭔가 속사정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 “로비용 비자금 틀림없다” ▼ 일단 은행을 잘 아는 친구를 만나 은행장의 판공비 규모 쓰임새 조달방법 등을 자세히 파악했다. “로비용 비자금이 틀림없어!” 함검사는 흥분을 가라앉힌 뒤 김중수부장 방으로 달려갔다. “수사대상이 누구든지 상관없는 겁니까?” “함검사, 무슨 일인데….” 김중수부장이 재촉했다. “수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저쪽(6공 실세나 집권세력을 지칭)의 여러 명이 걸릴 것 같습니다.” 4월21일 함검사는 안영모(安永模)행장을 전격 연행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안행장의 입에서 엄청난 내용이 쏟아졌다. 안행장이 뇌물을 준 정관재계의 거물급 인사들의 명단을 파악한 수사 실무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원조의원 이용만(李龍萬)전재무부장관 김종인(金鍾仁)전청와대경제수석 이현우(李賢雨)전청와대경호실장…. 명단에는 이들 외에도 차관급을 비롯한 재무부와 은행감독원 간부들의 이름도 상당수 들어있었다. 함변호사의 기억. “당시 이원조의원 등 거물급 인사의 수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억대의 뇌물을 챙긴 차관급 등 고위공직자들은 수사할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이들이 오히려 김영삼(金泳三)정부에서 승승장구하면서 결국 나라 경제를 망친 꼴을 보면서 그때 잡아넣지 않은 것이 후회되더군요.” 함검사는 이원조씨 등 4명이 안행장에게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보고하고 이들을 곧바로 소환할 것을 건의했다. 당연히 OK 사인이 떨어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검찰 수뇌부의 대답은 뜻밖에도 ‘NO’였다. “현역의원을 어떻게 진술만 갖고 소환할 수 있나. 물증이 있어야지.” 김영수(金榮秀)청와대 민정수석도 “물증이 없으면 수사하지 못한다”고 거들었다. 그러면 김대통령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김전수석의 설명. “동화은행장 사건이 터진 뒤 김대통령에게 보고했더니 ‘응, 철저히 해야지’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전혀 없었어요. 별로 걱정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와 검찰 수뇌부의 ‘선 물증, 후 소환’논리에 걸려든 셈이었다. 수사는 주춤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검 관계자의 설명. “수사가 진행중인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개입한 셈이죠. 이는 과거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도 없었던 명백한 월권행위였습니다. 물증논리는 과거 독재정권 시절 검찰 수뇌부가 권력을 의식해 일선 검사들이 수사하지 못하도록 막을 때 종종 사용했어요.” 함검사가 검찰 수뇌부와 청와대의 물증논리에 반발하자 김수석은 청와대로 함검사를 불렀다. 함변호사의 기억. “당시 이원조씨 사건에 대해 김수석과 얘기를 나누다 이씨를 반드시 사법처리해야 김대통령의 사정이 명실상부한 성역없는 사정이 된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곧 김대통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도 말했지요. 이렇게 말하면 김대통령의 성역없는 사정이라는 정책을 집행하는 민정수석이 격려해 줄 것으로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사정은 영 딴판이었어요.” 그러나 김전수석은 함검사를 만난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당시 검찰수뇌부에서 이원조씨의 경우 안행장의 일방적인 진술만 나왔지 구체적인 물증이 없다고 보고했어요. 그래서 기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전하면서 좀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함검사를 만난 적은 없고 민정수석 보좌관과 사정비서관을 통해 물어봤지만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 민주계 실세 회유도 받아 ▼ 청와대와 검찰수뇌부는 왜 이원조씨를 구하기 위해 그토록 애썼을까. 이씨의 측근인 모사업가의 기억. “대선 이후 이씨한테서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92년 대선 직전 선거자금이 부족한 김대통령의 가신(家臣)이 이씨를 두번이나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더군요. 이씨는 처음에 ‘5,6공 때도 정치자금과 대선자금 모금에 관여했다가 곤욕을 치렀다’며 완강히 거절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95년10월 노태우(盧泰愚)전대통령 비자금사건 수사에 관여했던 검찰 간부의 설명은 다르다. 이 간부가 노전대통령이 수사과정에서 털어놓은 얘기를 보고받은 내용은 이렇다. “노대통령은 92년 대선 직전 김대표에게 ‘이원조씨를 보내 대선자금 지원을 돕도록 하겠다’는 제의를 했다더군요. 그러나 김대표가 ‘이씨는 과거정권에서도 정치자금 때문에 문제가 됐던 사람’이라며 난색을 표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씨와 함께 상공부장관을 지낸 금진호(琴震鎬)씨를 김대표에게 보냈다고 하더군요.” 함검사는 수사과정에서 민주계 실세들의 회유도 많이 받았다. 검찰수뇌부와 청와대의 물증논리로 이원조씨 수사가 난관에 부닥친 5월초 어느날 서울 코리아나호텔. ▼ 수석비서관 수뢰도 확인 ▼ 함검사는 청와대 모비서관과 마주앉았다. 함검사는 평소 아는 사람에게서 문제의 비서관이 ‘아직은 때묻지 않은 개혁세력’이라는 말을 듣고 수사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 “정적(政敵)인 박철언(朴哲彦)의원만 구속하고 이번 수사에서 뇌물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인사들을 사법처리하지 않으면 김대통령의 개혁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이 신세진 사람도 비리가 있으면 잡아넣어야 국민이 김대통령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할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와대 비서관도 공감을 표시했다. 함검사는 그 자리에서 청와대 모수석비서관의 5천만원 수뢰사실이 적힌 메모를 건네주었다. 그 비서관은 그러나 “함검사가 건내준 혐의내용만으로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조사하기에는 부담이 있어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찰 수뇌부의 물증요구에 함검사는 할 수 없이 그동안 갈고 닦은 온갖 기법을 동원해 끈질기게 계좌추적을 시작했다. 계좌추적 과정에서 동화은행장의 비자금 외에 다른 재벌기업의 비자금도 찾아냈다. 정관재계의 부패 고리의 총체적인 모습이 상당부분 드러났다. 함검사는 자신이 ‘판도라 상자’속을 들여다 본 셈이었다고 말했다. 민자당 김종필(金鍾泌·현 자민련 명예총재·JP)대표의 1백억원대 비자금 계좌가 발견된 것도 이때였다. 물론 재산공개 때 신고하지 않은 돈이었다. 김중수부장을 통해 검찰수뇌부에 보고했다. “검찰을 뒤흔든 집권세력도 돈문제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건개(李健介·현 자민련의원)대전고검장도 슬롯머신사건으로 구속됐는데 우리도 JP를 칩시다. 그래야 정경유착의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이 방법만이 검찰이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동화은행 비자금사건 수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검찰 수뇌부는 끝내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표가 김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민자당을 뛰쳐나와 자민련을 창당하기 직전인 94년10월경. 검찰 고위간부 K씨가 검사직을 그만두고 막 개업한 함변호사를 찾아왔다. “함변호사, 동화은행사건 수사자료 있지. 특히 JP의 비자금 계좌가 필요해.” 함변호사는 부아가 치밀어 올라 K씨에게 쏘아붙였다. “지금 정치쇼하는 겁니까. 수사를 하자고 할 때는 안된다더니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다고 해서 다시 수사자료를 써먹으려는 것은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 수사진행중 日로 극비출국 ▼ 함변호사의 회고. “동화은행사건을 수사할 때 나는 성역없는 사정을 믿고 싶었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새로운 집권세력에 문제가 있다면 국민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93년5월초 서울 하얏트호텔내 이발관. 이원조씨의 비리관련설이 언론에 조금씩 보도되기 시작했다. “당신들, 정말 이러기야. 그러면 모두 까발릴 거야.” 이발을 하던 50대 사업가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몸을 반쯤 일으켜 칸막이 너머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쳐다봤다. 평소 안면있는 이원조씨가 전화기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사업가가 이씨의 전화내용을 이해한 것은 이씨가 5월18일 극비리에 노스웨스트항공편으로 도쿄(東京)로 출국했다는 보도를 본 뒤였다. 〈양기대·이수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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