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조순덕할머니 실상]짓밟힌 「악몽의 6년」

입력 1997-09-03 20:13수정 2009-09-2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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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살 순진한 처녀였지만 위안소에 도착하자마자 어떤 곳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함께 간 청진 처녀와 도망쳤지요. 헌병들에게 잡혀 밤새 채찍으로 맞았어요. 얼마나 살려달라고 외쳤는지 목소리까지 변했어요. 그후 일본군인들을 받았습니다』 경기 의정부시 12평형 영구임대아파트. 지난 1일 혼자 살고 있는 일본군위안부(정신대)피해자 조순덕할머니(76)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냘픈 체구에 병색이 완연해 한숨쉬기도 힘겨워보였다. 『나한테 뭘 듣겠다고. 나 정신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어, 내 말 믿지마… 그래도 나는 억울해』 지난해 봄부터 틈틈이 조할머니의 증언을 채록해오고 있는 한국정신대연구회 강정숙씨는 『위안부시절 부분에 이르면 할머니께선 얘기를 돌리려 한다』고 설명했다. 함남 함흥 출신인 조할머니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1939년 가을. 서울 언니집에 갔다가 돌아오던 길이었다. 원산역에서 기차에 오른 건장한 남자들은 아편을 갖고 있는지 조사한다며 철길공사장으로 끌고 갔다. 다른 조선처녀 7명과 함께 하얼빈을 거쳐 소련 접경지역 중국 어느 곳인가, 강변에 있는 부대 근처 위안소에 배치됐다. 『맞고 당하고 맞고 당하고…』 군인들은 총칼을 차고 있어 제대로 반항할 수도 없었다. 어느날 위안소 주인은 소련군이 온다며 떠나라고 말했다. 해방이었다. 걸어걸어 집으로 돌아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몸과 마음은 찢어질대로 찢어진 상태였다. 꿈 많고 쾌활했던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는 버선발로 뛰어나왔어요. 그날밤 엄마는 「말하지 말라, 살아왔으니 됐다」고만 하셨어요. 저는 여동생이 잠든 척하며 듣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90년대초 당국에 신고하라고 얘기한 것도 그 동생이었다. 한때 기억상실증에 걸리기도 했으나 악몽을 지울 수는 없었다. 93년 9월말 「일제하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대상자 결정통지서」가 날아왔다. 정부에 정식 등록된 한국내 생존 위안부 피해자는 1백58명. 대부분 칠순이 넘은 할머니인 이들은 지금도 악몽속에 살고 있다. 상당수 피해자들은 해방 당시 동남아와 중국 등 현지에 주저앉거나 자살했다. 가족의 외면과 사회의 무관심속에 피해자 할머니들은 생활고마저 심했다. 대부분 결혼생활은 엄두도 못냈고 각종 질병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10여년간 동거생활도 했으나 끝내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조할머니는 평생 가정부일과 비닐하우스 허드렛일 등 닥치는 대로 했다. 요즘도 몸은 방금 맞은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전쟁, 성폭력, 일본의 사죄와 배상, 그런 것 나는 몰라요. 그러나 일본 돈은 받지 않겠어요. 마지막 남은 자존심 때문이지요』 조할머니의 소원은 제대로 병을 치료받아 몇년이라도 더 사는 것이다. 그래서 데려다 키운 딸이 낳은 손녀(24)가 자신의 평생 꿈인 면사포 쓰는 것을 보고 싶다. 〈의정부〓김진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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