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전쟁나면 도망가야죠』

  • 입력 1997년 6월 25일 20시 18분


기자가 한 고등학생에게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묻자 『도망가야죠』라고 대답했다. 엊그제 TV화면에 비친 장면이다. 최근 전국의 고교생과 대학생 1천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여론조사에서도 전쟁이 나면 외국으로 피란하겠다는 응답이 14.2%, 지방으로 피란하겠다는 응답이 19.7%로 나타났다. 청소년 3명중 1명이 전쟁이 나면 도망가겠다고 응답한 것이다. 공산주의와 독재에 대항해 숱한 희생을 치르며 나라를 세우고 지키고 가꿔온 기성세대에게 청소년들의 이러한 깃털처럼 가벼운 국가관은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 많은 고귀한 목숨을 바쳐 피땀으로 지켜온 이 나라 이 국토가 헌신짝 버리듯 해도 좋을만큼 가치없는 나라라는 말인가. 기성세대가 무엇을 잘못 가르쳤기에 우리 청소년들이 그런 극단적 보신주의에 빠지게 됐는가. 같은 여론조사에서 청소년들의 34.5%가 전쟁이 나면 자발적이건 소집에 응해서건 「참전하겠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반드시 비관할 일만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전쟁이 나면」이라는 가정(假定)에 현실감을 느끼지 못한 탓에 장난처럼 대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무의식의 바닥에 잠재해 있던 「도망가겠다」는 의식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라면 간단한 일이 아니다. 지금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면서도 걸핏하면 「전쟁」을 들먹인다. 김정일(金正日)은 굶어죽을 바에는 「한판 붙자」는 자포자기적 심경으로 주민들을 내몰면서 전투력 강화를 독려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3명중 2명은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도 청소년의 39.7%는 우리 안보에 가장 위협을 주는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우리 청소년들의 안보관 국가관에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말해준다. 그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국가가 개인에게 왜 소중한 것이며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왜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체제인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다. 거기서 어떻게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이민가겠다」는 푸념이나 하고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자식을 해외로 빼돌려 병역이나 피하게 하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에게 전쟁나면 총을 들라고 가르치기도 어렵다. 공보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남녀 42.8%는 안보역량 제고방안으로 정치적 안정을, 24.6%는 경제적 번영을 들었다. 청소년에 대한 가장 확실한 안보교육은 조국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는 것이다. 정체성 잃은 세계화교육도 문제다. 철없는 청소년들의 나약함과 이기주의를 탓하기에 앞서 기성세대의 국가관부터 되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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