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기록문화

  • 입력 1997년 5월 14일 20시 34분


어떤 나라가 일류이고 어떤 나라가 이류인지는 경찰 산림 어린이교육을 보면 알 수 있다. 엄정한 기강 속에서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경찰, 무성한 숲, 어린이 천국이라 할 정도로 어린이에 대한 배려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나라는 예외없이 선진국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에 국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록을 잘하고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나라일수록 일류이다. ▼ 유용한 지식 묻혀버려 ▼ 일본이나 유럽의 50년 된 회사와 5년 된 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축적된 과거 데이터의 양이다. 생생한 데이터, 사례연구, 역사 같은 것들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기록문화가 너무 없다. 무엇인지를 규칙적으로 기록한다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한다. 일본 주부들은 90% 이상이 가계부를 적는데 한국 가정에서 가계부를 쓰는 사람은 30%도 채 안된다고 한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각종 노하우의 기록 보관 자체를 소홀히 하고 있어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의 전파가 느리고 때로는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선진기업에 연수를 보내 보면 「연수생마다 늘 같은 질문만 반복하고 돌아간다」는 뼈있는 비판을 듣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과거 우리 역사에 대한 기록도 불충분한데다가 해방 이후에는 군사혁명 등 여러 차례 정치적 불안과 혼란속에서 기록할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살기에만 급급한데도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또한 나만 잘 되겠다는 이기주의도 기록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옛날에 청기와를 만들어 파는 상인이 있었다. 청기와는 보통기와보다 훨씬 단단한데다가 빛깔이 고와 매우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다. 제법 짭짤한 재미를 본 기와장수는 이 재미를 독점하겠다는 욕심으로 그 독특한 제조기술을 누구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자식에게도 전수하지 않았다. 청기와뿐만 아니라 고려청자 조선백자 거북선 같은 선조들의 훌륭한 기술이 전혀 전수되지 못했다. 반면에 이웃 일본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도자기 기술을 가져다 계속 발전시켜 오늘날 세계적인 도자기 수출국이 되었다. 이와 같이 기록문화가 자리잡지 못하고 노하우가 제대로 전승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정보화 사회에서 제대로 경쟁력을 갖추기는 더욱 더 힘들다. 정보화 시대에서는 누가 먼저 필요한 정보를 갖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작은 데이터에서 정보가 축적되고 축적된 정보 속에서 지혜가 나오는 법이다. ▼ 축적된 정보는 자산 ▼ 정보화 시대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활주변의 사소한 것이라도 챙겨서 기록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선 주부들은 가계부라도 매일 매일 꼼꼼히 적어보자. 직장인들은 타임 다이어리를 꾸준히 작성해보고 일년쯤 뒤 평가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매년 정월 초에는 지난 해 스케줄에 대한 통계를 내보곤 한다. 해외여행 몇 건, 거래선 면담 몇 건, 경영회의 몇 건, 골프회동 몇 건 등 지난해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일별하기만 해도 금년엔 무엇을 해야겠다는 큰 그림이 머리에 들어온다. 이제부터 우리는 사소한 것을 따지고 기록하는 것에 대해 쩨쩨하다고 생각하는 실속없는 대범증부터 고쳐 나가야 한다. 이런 허세가 대충대충 마무리하는 타성으로 이어져 우리 제품, 우리 사회의 기본을 흔들리게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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