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공동체를 위하여]「한보부도」은행-정치권 모두 발뺌

입력 1997-03-27 07:40수정 2009-09-27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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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 기자] 이달초 각 시중은행 주주총회장. 한보사태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졌지만 한보와 연루된 임원들이 줄줄이 승진하거나 자리를 지켰다. 은행감독원으로부터 주의적 경고를 받은 조흥 제일 외환은행의 전무 3인(조흥 張喆薰·장철훈, 제일 李世善·이세선, 외환 趙成鎭·조성진)은 각각 행장승진, 임기계속, 중임을 했고 역시 주의적 경고를 받은 許鍾旭(허종욱·조흥) 朴龍二(박용이·제일)상무는 각각 전무와 감사로 발탁됐다. 문책분위기 속에서도 승진잔치를 벌인 셈. 「불사조」란 비아냥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한보 부도 후 책임 논란이 어지러웠다. 鄭泰守(정태수) 한보그룹총회장은 『산업은행이 당연히 해줘야 할 대출 3천억원을 안해줘 터진 억울한 부도』라고 항변했고 은행관계자들은 『권력의 입김없이 감히 엄청난 대출을 해줬겠느냐』고 발뺌했다. 청와대 재정경제원 통상산업부 은감원 등 실세(實勢)기관 고위 당국자들이 발뺌하는 모습은 더욱 가관이었다. 『한번도 정태수씨를 만난 일이 없다』 『한보의 청탁을 받은 일이 없다』 오직 한보의 무리수와 은행의 판단능력부족이 빚은 결과라는 설명. 온 나라엔 「네탓」만 있었다. 여론의 질타가 이어졌고 李壽成(이수성)전총리도 『책임지는 각료가 없다』며 일갈했다. 한때 유행한 「깃털론」도 『내가 무슨 책임을 지느냐』는 발상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고 보면 「책임실종」의 랭킹에선 역시 정치권이 선두다. 한 야당지도자에 대한 해묵은 용공시비는 미묘한 시기엔 아직도 터져나온다. 그 중대한 발언에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92년 대선 직전 부산에서 초원복국집 사건이 일어났다. YS(김영삼대통령)는 지역감정을 부추긴 발언은 애써 무시, 공격자측의 도청(盜聽)만을 문제삼았다. 연루자들은 짧은 자숙기간을 거친 후 승승장구했다. 그중 朴一龍(박일룡)씨는 현재 안기부 제2차장이다. 작년말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처리에 대해 국회의장은 사과 한마디 없다. 몇차례나 「정계은퇴」를 선언한 정치인도 있다. 『무책임한 공직자가 살아남는 풍토는 마치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장경제원칙을 되살려 도태시켜야 합니다』 (許鉦·허정 망미여중교장·60) 정부는 작년 무역수지적자가 70억달러가량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전망치를 두세번 수정했지만 모두 어긋났고 결국 2백억달러를 넘어서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민간기업에서 전망과 실적이 이처럼 어긋났다면 벌써 목이 서너번은 잘릴 일이지만 불이익을 받은 공직자는 없다. 현정권은 초기 「신경제계획」에서 95년부터 물가는 3%수준, 무역수지는 흑자, 금리는 한자릿수로 안정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다. 현직 대통령은 대선유세때 『직을 걸고 쌀개방을 막겠다』며 못 지킬 약속을 했다. 「무책임 레이스」에선 개인들도 지지 않는다. 『주가가 떨어지면 또 투자자들이 증권사객장을 점거, 시위를 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고객의 투자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집을 판 증권사 직원들도 여럿 있지요』 (孫學瑾·손학근 신한증권기획팀장) 엉뚱한 사람이 책임지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과 검찰을 정면비판하다 당국의 제재를 받은 李永守(이영수)재이손사장의 경우는 우리 사회의 희비극이다. 17년전 농지전용을 한 일로 뒤늦은 계고장을 받은 것. 자기 발언에 대한 책임을 희한하게 져버렸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책임을 분명히 하려는 움직임」이 움트고 있다. 아파트를 지으면서, 가스파이프를 묻으면서 공사책임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새겨둔다. 대학생들은 대자보를 붙이면서 자신의 연락처를 남긴다. 농부는 수박과 참외에 자신의 사진과 연락처가 쓰인 상표를 붙이고 백화점 판매원들도 자기의 이름을 걸고 일을 한다. 『면피나 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른 삼풍사고 성수대교사고가 잉태되는 것입니다』(徐廷昊·서정호 앰배서더호텔회장) 『아이를 키우면서도 책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엄마들끼리 얘기를 나누면서 「겨레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 다른 엄마들이 막 웃습니다. 많이 배운 엄마일수록 더 그래요』(河美貞·하미정·34·주부·서울 서교동) 「책임실종」의 불행한 현실로부터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어린이의 질문에 우리는 답을 준비해야 한다. 『비뚤어진 우리 사회, 누가 책임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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