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노트]김세원/카페에 앉아

  • 입력 1997년 1월 21일 20시 13분


한국통이라고 자처하는 외국인들더러 지난 10년 사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을 꼽으라면 대개는 「지하다방에서 지상커피숍」으로의 변화를 꼽는다. 하긴 80년대 중반만 해도 다방은 으레 지하에 자리잡거나 창마다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한낮에도 어두운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 도시의 번화가에서 이렇게 「어둡고 은밀한 만남의 장소」를 찾기는 쉽지 않다. 80년대 후반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들의 특징은 밝고 환하다는 점이다. 대부분 1층이나 2층에 있고 전면이 유리로 돼 있어 밖에서 안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환한 커피숍」과 함께 요즘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생활실명제 바람도 자신감과 당당함의 산물이다. 「강성산우유」 「가평식혜」처럼 원산지나 생산자이름을 상표로 내건 식품이나 농산물이 나오고 백화점같은 서비스업체의 매장종업원들이 명찰을 달기 시작했다. 회사대표나 생산책임자가 상품을 선전하는 모델로 등장하는 광고도 부쩍 늘었다. 심지어 자유로운 비판의 대명사인 대학가의 대자보나 유명연예인의 이름을 단골도용하던 나이트클럽 웨이터의 명함도 실명제로 가는 추세다. 시내버스기사실명제 불법주정차 단속실명제 안전관리실명제 건물시공실명제 도로실명제 등 곳곳에서 실명제가 추진되거나 시행중이다. 이처럼 모두들 익명성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열린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유독 정치만은 아직도 어두운 「밀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같다. 새해벽두부터 전국을 파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만든 개정노동법도 노사관계의 틀을 다시 짜야한다는 시작은 좋았다. 그런데 막상 당정협의라는 「블랙박스」를 거치고 나서는 내용도 절차도 형편없이 구겨져 버렸다. 표결할 때 자기 이름을 밝히는 「의정실명제」가 실시된다면 법안처리를 할 때마다 당의 간판뒤에 숨어 「무명씨」가 돼 버리는 국회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낼수 있지 않을까.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두꺼운 벽이 투명한 유리로 바뀌게 되면 날치기통과라는 부끄러운 관행이 없어질까. 시위장면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동의 한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김 세 원<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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