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여자의 사랑(13)

  • 입력 1997년 1월 13일 20시 43분


첫사랑〈13〉 이제, 안녕. 하고 마지막에 쓴 부분은 바렌카가 제부스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추신을 보고 옮겨 쓴 것입니다. 그 추신에 저의 가슴은 지금 눈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눈물이 제 얼굴을 적시고, 가슴을 적십니다, 하는 말은 차마 옮겨 쓰지 못했습니다. 그럴 만큼 슬프지 않았던 것보다, 그럴 만큼 슬펐다 해도 그런 말을 쓰는 건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또 편지를 받은 아저씨도 황당해하고 말테구요. 아름다운 건 언제나 아름다운 것 만큼의 빈자리가 있는 법이라고, 시를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시인 같은 얼굴로 시인처럼 말했습니다. 친구 목걸이 속의 그 국어 선생님이 말이죠. 그리고 그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말을 우리는 좋아하고요. 그런데 그 편지는 제대로 아저씨에게 배달되었을까요. 쓰기도 많이 망설여 썼지만 보내기도 많이 망설인 끝에 봉투에 신문사 주소를 쓰고 아저씨의 이름을 썼습니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보내는 사람의 주소엔 아무것도 쓰지 않았습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써야 했다면, 아마 그 편지는 보내지 못했을 겁니다. 두 번이나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쓴 봉투를 소리도 나지 않게 가만히 가만히 찢어버렸습니다. 다만 아저씨에게 아저씨의 글을 열심히 읽던 한 아이가 있었고, 이제 그 글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많이 쓸쓸하고 외롭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릅니다. 아무도 몰래 학교 옆 우체국에 들러 우표를 사고, 그 우표를 봉투에 붉은 색으로 찍혀 있는 네모 칸에 조금도 벗어나지 않도록 반듯하게 붙여 우편함 투입구에 넣을 때 손끝으로 전해 지던 짧은 후회와 허전함을 어떻게 표현할까요. 비록 보내는 사람의 주소를 쓰지 않기는 했지만 왠지 보내지 말아야 할 편지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한순간의 짧은 후회와 무언가 내 마음 전부를 다 놓고 났을 때처럼 손끝에서 가슴으로 미어져 오던 그 허전함을 말입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 마음의 사랑을 담은 편지를 여자 아이는 열아홉 살 되던 해 여름에 썼습니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아저씨께, 얼굴을 모르기에 조금은 더 아름답고 슬프게 내 마음을 담아서. 세상에 대해 처음 혼자만 아는 비밀을 만든 기분이었습니다. 우체국을 나설 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그해 여름의 폭양을 기억합니다. 그 폭양 한가운데 한 여자 아이가 갈 길을 몰라 잠시 허둥댔던 것도 기억합니다. 내 나이 스물두 살이 되었을 때 그것이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란 것도 모른 채. <글:이 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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