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방송을 통한 북한의 사과

  • 입력 1996년 12월 29일 20시 56분


개인은 물론 한 나라가 매우 큰 잘못을 저지르고 사과할 때는 피해를 본 당사자를 찾아가 진솔하게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도리다. 북한이 강릉 무장간첩 침투사건을 일으킨지 1백여일만인 29일 방송을 통해 사과한 것은 방식과 내용을 엄격히 따질 때 일반적인 원칙에 어긋나고 또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우선 대외용(對外用)인 평양방송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외교부 대변인의 성명발표 형식을 취한 것부터가 외교관례상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북한의 이런 조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한국에 대한 잇단 도발행위끝에 북한이 공식 사과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며 또 같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 60년대의 청와대 습격미수사건, 70년대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80년대의 아웅산 폭탄테러사건 및 KAL기 폭파사건에는 사과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이 방송을 통해서나마 공식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첫째, 좌초된 잠수함 선체와 생포간첩의 진술 등 물증(物證)이 뚜렷한데다 둘째,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의 성명과 마닐라 韓美(한미) 정상회담에서의 북에 대해 수락할 만한 조치를 촉구하는 등 국제적 압력이 강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한국정부의 확고한 대응과 한미 공조체제도 사과를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이 경수로사업 및 식량지원을 받아야 할 긴박한 내부사정이 겹쳤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북한의 이번 사과는 「피해자로서 가해자에게 백배 천배 보복하겠다」는 협박을 일삼아온 그동안의 태도를 완전히 바꾼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 및 북―미(北―美)관계가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이전 상황으로 회복되고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려면 북한의 이번 사과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하며 또 사과내용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경수로사업 남북경협 대북(對北)식량지원 그리고 4자회담 설명회와 북―미관계 정상화 접촉 등을 통해 한반도 안보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무장간첩을 다시 침투시키지 않고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원한다면 사과성명만 방송하고 미국과의 접촉에 집착할 게 아니라 남북대화에 적극 나서야 한다. 그들이 남한에 침투시켜 희생시킨 무장간첩들의 유골도 조용히 돌려받아야 한다. 북한은 대외용 방송을 통해 한 사과내용을 북한 주민에게도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 김정일체제유지를 위해 또는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이미 사과한 문제를 또다시 악용한다면 그들은 진실성을 의심받고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양식과 양심을 되찾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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