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안개속의 두가지 풍경

  • 입력 1996년 12월 22일 20시 20분


연속하는 시간을 가는 해와 오는 해로 나눈 것은 인간의 뛰어난 지혜였다. 묵은 해를 보내면서 반성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결의를 다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1996년을 보내면서 뒤를 돌아보면 어쩐지 모든 것이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다시금 테오 앙겔로풀로스감독의 명화 「안개 속의 풍경」을 눈앞에 떠올린다. 흐린 날씨에 진눈깨비가 내리고 안개가 자욱하다. 그 속을 나이어린 누나와 동생이 멀리 독일로 떠났다는 뜬 소문만 믿고 아버지를 찾아나선다. ▼「간첩」과 권력층의 부패▼ 앙겔로풀로스에게는 현대란 그처럼 밝은 빛을 보지 못하고 온통 회색으로 뒤덮인 풍경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사실 현대사의 특징은 급격한 충격이 왔는가 하면 급속한 망각이 뒤따르고 무언가 우울한 심정만이 남는다는데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안개 속의 풍경이고 회색의 세계다. 지난 해의 흐름 속에서 그런 안개를 헤치고 구름 속에 떠있는 섬처럼 사건들을 더듬어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먼저 초가을 아름다운 날씨를 피로 물들인 잠수함 무장간첩사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치지 않는 권력층의 부패사건들. 여기에는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의 사건도 들어 있고이제는흠없는 선량이라고 자처하는 국회의원들의 부정한 선거도 들어 있다. 북한의 간첩사건과 그칠줄 모르는 부정과 부패. 이 두가지 사이에 무슨 직접적인 관련이나 특별한 공통점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나라 역사속에서 나타나 우리의 심정을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점에서 이 두가지는 일맥상통한다. 충격적인 사건은 우리의 노여움을 폭발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노여움은 절망으로 바뀐다. 그러다가 그 절망은 체념으로 변하고 그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이 사회를 안개로 뒤덮고 만다. 그렇게 볼 때 이 두가지는 모두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며 우리나라를 어둠으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병을 우리는 언제까지 끌고 다녀야 하는 것일까. 이 두가지 풍경에 행이건 불행이건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모두가 시대에 뒤떨어진, 역사에 역행하는 망령이라는 것이다. 북한이 대남전략으로 무장간첩 파견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면 그들의 사고방식이란 1950년대에 머물러 있다고 해야 한다. 그런 발상으로 어떻게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백성을 이끌어가겠다는 것인가. ▼안개는 언제 걷히나▼ 부정과 부패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이용해서 치부하고 상납해서 더높은 관직을 누린다는 봉건적인 양식으로 오늘의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 해를 보내면서 무장간첩사건이며 부정부패며 이 모두에 깊은 자기반성과 참회를 요구하는 것은 낡은 역사에서 벗어나야 살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질없는 변명을 일삼거나 무거운 침묵을 계속하는 한 우리의 현실에 드리우고 있는 안개는 더욱 짙어질 따름이다. 앙겔로풀로스는 「안개 속의 풍경」마지막 장면에서 남매가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아버지를 찾아 국경을 넘는다고 했다. 거기서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다. 우리의 안개는 언제 걷히기 사작할 것인가. 지 명 관<한림대교수·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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