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208)

  • 입력 1996년 11월 8일 20시 47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15〉 오늘 현석은 나를 몇 번이나 놀라게 만든다. 그는 달라진 것 같다. 카페에서는 내가 잘못 본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소심하지도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더구나 이기적이지도 않다. 이따금 나는 내가 왜 현석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보곤 했었다. 현석은 내 마음에 드는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쳐다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옆얼굴이나 모든 화제에 언제나 한마디쯤 냉소적인 논평을 던질 수 있는 식견들. 그뿐이 아니었다. 나는 스무살의 오월에 남의 학교 축제에 파트너로 갔다가 나무가 많은 그곳의 캠퍼스에 매료되었다. 그곳에 마음대로 드나들기 위해서 그 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당장 결심을 굳혔다. 바로 그 캠퍼스에 있는 현석의 연구실 역시 내 마음에 드는 곳 중 하나였다. 그밖에도 그가 가진 오래된 가죽끈 시계, 코듀로이 재킷과 그 안에 즐겨 받쳐 입는 폴로셔츠, 몽블랑의 마이스터 스틱 만년필,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타탄 체크가 들어있는 손수건, 그리고 사용하는 어휘들, 단문으로 말하는 버릇, 희고 긴 손가락, 손가락을 세운 채 두 손을 깍지끼는 버릇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람을 만나는 첫 단계에서 관심을 불붙여줄 수는 있지만 사랑을 키워줄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어떤 타입의 남자든 상관없이 좋아한다. 그런 것이 다 사고의 탄력성 덕분이라고 만족하고 있기도 하고.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다. 깔끔한 사람은 까다롭고 섬세한 사람은 소심하게 마련이다. 현석은 유식한 데다 인상까지 좋다는 죄로 쓸모없는 관심에 시달려온 사람답게 몹시 방어적이기도 했으며 그것이 냉소로 위장될 때는 역겨울 정도였다. 나는 그런 역겨움, 즉 이면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생각해 왔다. 맹세코 그에게 어떤 종류의 헌신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루에서 뻐꾸기가 울기 시작한다. 한번, 두번…열두시인 모양이다. 왕자와 춤추는 데에 정신이 팔렸던 신데렐라에게 갑자기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소리였다. 나는 일어나서 옷을 입는다. <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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