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미련없이 떠난 최영필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6월 16일 05시 30분


최영필은 1997년 현대에 입단한 뒤 21년간 프로 마운드에서 버텼다. KBO리그 역대 최고령 투수를 눈앞에 두고 그는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라며 자진강판을 결정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최영필은 1997년 현대에 입단한 뒤 21년간 프로 마운드에서 버텼다. KBO리그 역대 최고령 투수를 눈앞에 두고 그는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라며 자진강판을 결정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역대 최고령 앞두고, 21년 프로생활 자진강판
“타자 못 이길 때 유니폼 벗는다” 나와의 약속
현대 시절의 쓴맛이 오히려 선수생활 원동력
“하루하루가 전쟁, 증명을 하는 세월이었다”
“오랜 세월 버텨준 어깨와 팔꿈치 고생했다”


이별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고 하더니, 그와의 이별 역시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찾아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쩌면 역대 최고령 1군 등판 기록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기에 그의 갑작스런 퇴장 소식은 다소 황망했다. 더군다나 시즌이 끝난 뒤가 아니라, 시즌 도중이어서 더더욱 그랬다.

9일 KBO에 웨이버 공시 신청을 통해 은퇴를 알린 최영필(43). 1997년 현대에 입단한 뒤 21년간의 프로생활을 스스로 정리했다. 누구 못지않게 우여곡절로 굽이쳤고, 누구 못지않게 절절한 사연으로 점철됐던 야구인생. 그 지난했던 세월을 그냥 묻어버리기엔 아쉬웠다. 은퇴 발표 후 일주일 가까이 흐른 시점. 수원 집에서 쉬고 있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 KIA 최영필.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전 KIA 최영필.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 21년 선수생활 마감, 이제는 실감

-은퇴를 결정한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 어떻게 지냈나.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온몸이 알콜이라서. 하하. 농담이고…. KIA 구단에 ‘잠시 쉬겠다’고 하고 수원 집에 올라와 있다. 그동안 많이 응원해주셨던 분들, 친구들, 지인들에게 전화도 드리고, 찾아뵙고 인사드리면서 일주일을 보냈다.”

-이제 은퇴가 실감나는가.

“좀 편해졌다. 아침에 편하게 늦잠을 자는 게 달라졌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해 30년 이상 운동만 해 와서 그런지 몸이 근질근질해지고 있다. 우리는 운동을 안 하면 아프기 때문에 이제 슬슬 움직여야겠다.”

-막상 야구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가족들은 뭐라고 하던가.

“가족하고는 사실 그 전부터 얘기를 계속 하고 있었다. 나 스스로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겠다고 미리 얘기를 해 놨다. 집사람은 그냥 ‘그동안 고생했어요’라고 하더라. 아들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더라.”

-아들(종현)이 경희대 3학년에 재학 중인데, 예전부터 프로에서 부자가 같이 선수생활을 하는 게 꿈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됐으면 좋겠지만, 아들이 고등학교(제물포고) 졸업하면서 프로에 들어오지 않고 대학을 갔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말했던 건 고졸로 생각하고 얘기했던 거였다.(웃음) 물론 그런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나의 선수생활이 연장된 부분도 없지는 않다.”

SK 시절은 아들 최종현(현 경희대)이 제물포고에 다닐 당시 사상 최초로 프로에서 부자 선수가 되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SK 시절은 아들 최종현(현 경희대)이 제물포고에 다닐 당시 사상 최초로 프로에서 부자 선수가 되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 현대 시절의 쓴 맛이 내 인생의 보약

-수원 유신고와 경희대 출신으로 1997년 1차지명을 받고 현대에 입단할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그러나 투수왕국 현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다.


“그땐 나도 굉장히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서 매년 스프링캠프 시작할 때는 4선발, 5선발 경쟁을 하다가 결국 밀렸다. 그런데 그때가 나를 가장 많이 바꿔 놨다.”

-무엇이 바뀌었나.

“아마추어 시절에는 솔직히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다. 안 해도 톱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에서 쟁쟁한 선배들과 후배 김수경 등에게 매번 밀리고 꺾이면서 나를 그들과 일대일 대입해서 냉정하게 분석해본 적이 있었다. 모두 나보다 월등하고 완벽한 부분이 많았다. 그때부터 연습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던 것 같다. 당시 몸이 여기저기 좋지 않았지만 어깨 훈련만큼은 정말 상상하지 못할 만큼 많이 했다. 내 어깨가 20년간 버텨온 원동력이 됐다. 인생에 약이 됐던 시절이다.”

-2001년 시즌 중반에 트레이드(현대 최영필+김홍집↔한화 이상열)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말이 전천후 투수지, 선발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마무리도 아닌 고단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가장 많은 역할을 했던 시기였다.

“한화 10년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발목이 돌아가 수술을 하기도 하고 참 많이 아프기도 했다. 그래도 거기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야구장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노(No)’라고 하지 않았다. 선발이면 선발, 중간이면 중간, 마무리면 마무리, 팀이 필요로 하다면 했던 시절이다. 특별한 보직은 없었지만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야구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대 시절 최영필. 스포츠동아DB
현대 시절 최영필. 스포츠동아DB

● FA 미아, 멕시칸리그, 독립리그…

-2010시즌 후 한화에서 FA(프리에이전트) 선언을 했지만 미아가 됐다. 당시 다른 팀에서 영입하고 싶어도 보상선수 때문에 영입할 수 없게 되면서 이 문제가 공론화되기도 했다.


“솔직히 한화에서 열심히 했지만 대우를 못 받았던 것 같아 아쉬웠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멕시칸리그까지 가서 문을 두들겼는데.

“캠프에 합류해서 테스트를 봤다. 그쪽에서 나에게 원한 건 시속 90마일(145㎞)이었다. 우리로 치면 캠프 시작 단계였는데, 3게임을 하고 내용은 나쁘지 않았는데 1마일을 못 올려 인연이 안 됐다.(웃음)”

-그리고 일본 독립리그로 갔다.

“한국에 잠시 들어와 있다가 일본으로 갔다. 포기할 수 없었다. 일본 시코쿠리그 가가와 팀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등록선수가 다 차 있었기 때문에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독립구단 서울 해치에 입단해 일본 간사이리그에 갔던 것이다. 연습이야 혼자 할 수 있지만 실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년의 유랑 끝에 SK 유니폼을 입었다.

“은퇴를 결심하고 나니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치더라. 그런데 선수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다름 아닌 SK에 입단해 첫 등판을 했을 때였다. 당시 스프링캠프까지 잘 소화하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면서 5월(30일)에 첫 복귀전을 치렀다. 원래 긴장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그때의 긴장감은…. 모두 안 된다고 했는데, 나 혼자 고집을 부려서 포기하지 않고 복귀를 했기 때문에….”

-SK에서 쏠쏠한 활약을 했다. 그런데 2013시즌 후 다시 방출됐다.

“이때도 주변에서는 가까운 사람들마저 ‘이제 안 되는 것 아니냐’고 하더라. 그런데 또 나 혼자 ‘된다’고 우기면서 백방으로 연락을 하고 뛸 팀을 찾았다. 그때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KIA와 인연이 닿았다. 그때 기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어쩌면 이렇게 더 좋은 모습으로 유니폼을 벗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한화 시절 최영필. 스포츠동아DB
한화 시절 최영필. 스포츠동아DB

● 현역 최고령 미련?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

-순탄치 않은 야구인생이었다.


“내 야구인생이 매일매일 현장에서 증명해 나가는 나날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나이가 들었을 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5월말에 1군에 호출된 뒤 2경기(5월30일과 31일 NC전)에 등판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나.

“올 시즌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 전에 KIA에 합류하게 됐을 때도 항상 누군가가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물어보면 ‘내가 마운드에 올라가서 타자를 못 이길 것 같으면 옷을 벗어야하는 것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지금 그런 모습이 됐다. 사실 NC전 때 나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컨디션에도 타자를 이기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자신감으로 야구를 해오고 버텨왔는데, 쪽팔린 게 싫었다. 더 버텨서 결과가 좋게 나오면 좋겠지만, 똑같은 결과가 나오면 내가 더 참기 힘들 것 같았다. 이젠 그만둘 때라고 판단했다.”

-조금만 더 버텼으면 역대 최고령 기록까지 갈 수 있었다. 마지막 등판이 43세18일이었다. KBO리그 역대 최고령 1군 등판이 송진우의 43세7개월7일이다.

“개인적으로 그 부분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미련이 없다. 하다보니까 여기까지 오게 된 거지, 그걸 생각하고 야구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작년에 최고령 세이브(41세10개월30일)는 했으니까.(웃음) 그럼 됐다.”

-열심히 살아온 야구인생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승 반지 하나 끼고 은퇴했으면 했는데, 그게 아쉽다. 1998년 현대가 우승할 때 기회가 있었는데, 왼손투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빠졌다. 2006년 한화, 2012년 SK 시절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었는데 둘 다 삼성한테 꺾였다. 올해 KIA가 우승에 도전할 기회인데 이렇게 그만두게 돼 또 기회가 없어졌다. 이젠 선수가 아니지만 사이드에서 KIA 우승에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일지 찾아보겠다.”

-프로에서 20년 넘게 투수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프로 입단 후 21년간 뛴 부분은 자랑스러울 것 같다.

“아프기도 많이 아팠고. 안 좋은 몸 가지고 대졸로 프로에 들어와 20년 넘게 투수를 한 데 대해 나 스스로 대견스럽더라. 팔꿈치 수술도 했고, 발목이 돌아가 수술도 했다. 어깨하고 팔꿈치 보면서 혼자 속으로 ‘그동안 고생했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이병규, 손민한, 진갑용, 강혁…. 아마추어 시절부터 한국야구사에 이름을 새겨온 1974년생들(손민한은 1975년 1월생으로 1974년과 동기)이 모두 그라운드를 떠났다. 마지막까지 홀로 버텨오던 최영필도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말이 맞다면, 동기들 중 최영필은 가장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한 셈이다.

천둥처럼 우렁찼던 적도 없었고, 번개처럼 빛났던 적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세월과 맞서고, 치열하게 자신과 싸워왔다. 그리곤 역대 최고령 등판 기록을 코앞에 두고 “이젠 때가 됐다”며 자진강판을 선택했다. 프로에서 일등이 되지 못한 그로선 아쉬울 법도 하지만 “미련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인생은 미완성”이라며.

전 야구 선수 최영필.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전 야구 선수 최영필.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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