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의 외야석] 프로팀에서 만난 서울대야구부 첫 승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8월 25일 05시 30분


삼성 야구단 신동걸 대리는 서울대 야구부의 역사적 첫 승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인생에서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삼성 야구단 신동걸 대리는 서울대 야구부의 역사적 첫 승 사진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인생에서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2004년 서울대 야구부 첫 승 신화의 주인공
일본 사회인야구선수, 삼성 프런트 입사까지
다큐멘터리 같은 삼성 신동걸 대리 인생도전

2004년 9월 놀라운 뉴스가 전해졌다. 1977년 창단한 서울대학교 야구부가 27년 만에 201경기 만에 첫 승을 올렸다는 소식, 서울대학교 야구부는 그 때도 지금도 체육특기생이 단 한명도 없다. 오롯이 학업 성적만으로 대학에 입학한 선수들이 모든 선수가 특기생인 송원대학교에 2004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 B조 예선리그, 공식경기에서 이긴 것이다.

최고의 수재들이 모여 있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전문적으로 야구를 한 선수들을 이길 수 있었던 열정과 노력 등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이전까지 다른 팀들은 서울대학교와 경기에서는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 1점도 주지 않고 10점 이상을 올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서울대 야구부는 수비부터 기초를 다져 실책 없이 경기를 마치며 26년 만에 첫 승을 거뒀다. 실패의 가르침, 포기하지 않는 도전은 지금도 기억된다.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날 이후 서울대 야구부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특기생들이 뛰고 있는 타 학교의 벽은 높다. 그러나 그 열정의 DNA는 이어지고 있다. 그날의 주역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 중 한명은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단에 있다.

신동걸(33) 삼성라이온즈 홍보팀 대리는 대학 2학년 때인 2004년 9월 1일 그 경기에 1루수 6번 타자로 출장해 3타수 3안타를 치며 승리의 기쁨을 함께 했다. 24일 그와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에서 마주 앉았다. 그날의 승리는 여전히 모든 팀원들에게 큰 자부심이자 인생을 더 즐겁게 살며 큰 꿈을 향해 도전하는 원동력이었다.

-비록 선수는 아니지만 서울대 야구부 첫 승리의 주역이 프로야구팀에 있다.

“인생의 목표가 세 가지였다. 다시 그라운드에서 뛰기 위해 서울대학교에 가기, 서울대야구부에서 첫 승하기, 야구선수로 단 하루라도 돈을 벌어보기. 이 모든 것을 다 이뤘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지금 하고 있다. 프로구단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 순간이 큰 자부심이며 인생의 우상이었던 이승엽 선수를 바로 곁에서 프런트로 돕고 있는 것도 기쁘다.”

-3가지 인생 목표가 매우 흥미롭다.

“세광고등학교에서 동생과 함께 야구를 했었는데, 동생이 야구를 더 잘했다. 가정 형편상 동생이 야구를 하는 것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여 그만뒀다.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야구를 했는데 어떻게 서울대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나?

“기초가 약해서 공부는 많이 뒤처졌다. 그래도 반에서 1등 2등 하는 친구들과 꼭 짝을 하려고 했다. 그러다 서울대학교에 가면 야구부에 입단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무조건 서울대에 간다’는 목표를 세우고 재수, 삼수를 했다. 짝을 했던 친구들이 서울대에 가서 과외도 해줬다. 평생 은인들이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2003년에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했다. 다시 그라운드에 서고 싶었는데 그 꿈을 이뤘다.”

-그렇게 어렵게 돌아간 그라운드에서 첫 승의 감격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지금도 만나면 그날 이야기를 한다. 생생하다. 꼭 첫 승을 거두자는 같은 꿈을 갖고 있었던 형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날 완봉승을 한 박진수 형은 체육교사다. 포수로 맹활약한 장태진 형은 SK그룹에 있다.”

삼성 신동걸 대리. 라이온즈파크. 사진|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삼성 신동걸 대리. 라이온즈파크. 사진|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더 놀라운 것은 졸업 후 일본 사회인야구 신일본제철에 입단했다.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사실 대학시절 야구에 빠져 취업 준비를 전혀 못했다. 십자인대파열 부상이 있었는데 재활 기간 아르바이트를 한 돈을 모아놨었다. 같은 좌타자에 1루수인 이승엽 선수가 인생의 영웅이었는데 일본에서 뛰고 있는 모습을 단 한경기라도 보고 싶어 무작정 일본에 갔다. 그러다 작은 어학원까지 등록했는데 후쿠오카 사가현 인근 토스라는 곳이었다. 바로 옆 토스 고등학교 야구부를 기웃하다 훈련을 도왔고 감독과 알게 돼 매우 가까워졌다. 감독께서 ‘야구를 계속 하고 싶냐?’고 물어서 ‘네!’라고 대답했고 사회인야구 팀 트라이아웃에 추천을 해줬다.”

-일본 사회인야구 팀의 수준은 매우 높다. 한국 국가대표 팀을 이긴 적도 있을 정도다. 어떻게 합격 했나?

“정말 운이 좋았다. 60명이 테스트를 봤는데 연습경기에서 홈런을 쳤다. 한참 근력 훈련을 열심히 할 때라 다른 선수들과 달리 힘이 좋아보였나 보다(웃음).”

-2009년 한 시즌을 뛰었다. 일본 사회인야구 선수의 생활과 처우는 어떤가?

“연봉은 300만 엔이었는데 세금과 기숙사비를 많이 제했다. 9시에 출근해 4시에 퇴근한 후 훈련을 했다. 외국인이라 창고관리를 했다. 매우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행복한 순간이었다. ‘야구 선수로 단 하루라도 밥벌이를 해보자’는 약속을 지켰다. 2010년에 비자가 발급이 되지 않아 돌아오면서 스스로 한 단계 성숙된 것을 느꼈다.”

-취업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후 한진해운에 입사했고 삼성으로 스카우트됐다.

“귀국해서 사실 야구기자를 하고 싶었는데 다 떨어졌다(웃음). 한진해운에는 정말 운 좋게 공채로 입사했다. 일본어를 열심히 배워 자격증을 따놨는데 해운회사이다 보니 해외 경험과 어학 실력을 높이 평가해준 덕분이었다.”

-선수는 아니지만 이렇게 프로야구팀으로 왔다. 그것도 인생의 영웅이 있는 팀에.

“지난해 삼성 라이온즈에 경력 사원을 뽑는다고 삼성그룹 계열사에 다니는 서울대 야구부 동료가 추천을 해줬다. 이승엽 선수는 처음에 너무나 좋아하던 사람이 앞에 있어 말도 못 걸었다. 아직 예전에 그렇게 동경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곁에서 직접 볼 수 있고 의미 있는 기록에 대한 도전, 그리고 가치 있는 선수생활의 마무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다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고 그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어 감사하다. 먼 길을 돌아오느라 또래에 비해 많은 돈을 모은 것은 아니지만 행복하다. 어머니께서 항상 말씀하셨다. 사람이 먼저 포기해서 그렇지 꿈은 언젠가는 이뤄진다고. 그 말씀을 지금도 항상 감사하게 품고 있다.”

모든 인생은 드라마라고 하지만 야구를 그만둔 고교생에서 서울대입학, 서울대야구부 첫승, 일본 사회인야구 도전에 대기업 사원까지. 인터뷰를 끝내는 순간 명품 장편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아 절로 박수를 건넸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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