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센 송지만에게 듣는 ‘한국야구 황금세대 92학번 동기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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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 공 맞고 한달간 팔 못들어… 성민-선동에겐 홈런 꿈도 못꿔”

넥센 제공
넥센 제공
1993년 어느 봄날. 지금은 사라진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한양대와 인하대의 경기가 열렸다. 마운드에는 ‘코리안 특급’ 박찬호(40·전 한화)가 서 있었다. 몇 년 후 메이저리그를 호령하는 대투수가 됐지만 한양대 2학년이었던 당시 박찬호는 그저 공만 빠른 투수였다. 변화구는 거의 던지지 못했고 직구 제구도 형편없었다.

악명 높은 박찬호의 나쁜 제구에 희생자가 나왔다. 그의 강속구에 인하대 타자가 왼쪽 팔꿈치를 정통으로 맞은 것이다. 그 타자는 그 뒤 한 달 동안 왼쪽 팔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박찬호와 92학번 동기로 인하대 2학년이었던 송지만(40·넥센·사진)이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오릭스를 거쳐 지난해 한화에서 뛰었던 박찬호는 지난해 말 마운드를 떠났다. 최근에는 SK에서 방출된 박재홍마저 은퇴를 선언했다. 한국 야구의 ‘황금세대’로 불리는 92학번 가운데 이제 살아남은 선수는 송지만뿐이다. 미국 애리조나에서 팀 훈련 중인 송지만은 29일 “고교 시절만 해도 나나 찬호는 명함도 못 내밀던 선수였다. 각 팀에 좋은 선수가 차고 넘쳤다”며 오랜 기억을 떠올렸다.

○ 모든 경기가 치열한 전쟁

92학번이 고3이던 1991년에는 특히 좋은 투수가 많았다. ‘빅3’로 불렸던 임선동(휘문고), 손경수(경기고), 고 조성민(신일고)을 필두로 손혁(공주고) 안병원(원주고) 차명주(경남상고) 염종석(부산고) 정민철(대전고) 등 초고교급 투수가 즐비했다.

송지만은 “정식 경기는 물론이고 연습 경기에서도 에이스 투수들 간에 기 싸움이 대단했다. 서로 자존심을 걸고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공을 던졌다. (조)성민이 같은 경우엔 방망이도 잘 쳤다. 자기가 던지고 안타 치고 홈런 치고 다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선동이나 성민이한테 안타를 친 적은 있지만 홈런 같은 건 아예 쳐 보질 못했다. 그만큼 좋은 공을 던졌다. 나 같은 타자들은 ‘저런 투수들의 공을 한번 쳐 보고 싶다’는 승부 근성이 생겼다. 그래서 다들 더욱 열심히 운동을 하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 선의의 경쟁자이자 자극제

인하대를 졸업한 송지만은 1996년 한화에서 데뷔했다. 92학번 동기로 건국대를 졸업한 이영우도 같은 해 한화에 입단했다. 둘을 포함해 그해 대학을 졸업한 92학번 동기들이 대거 프로로 뛰어들었다.

동기들 간 치열한 경쟁은 프로에 와서도 계속됐다. 송지만은 이영우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면서 기량이 크게 늘었다. 2000년 송지만은 타율 0.338에 33개의 홈런을 쳤고, 이영우는 타율 0.318에 25홈런을 기록했다. 송지만은 “팀을 불문하고 동기들은 선의의 라이벌이자 좋은 자극제였다. 성적의 목표가 되기도 했고 연봉의 잣대가 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동기들은 하나둘씩 은퇴하기 시작했다. 박재홍이 은퇴하면서 이제 그의 동기는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송지만은 “재홍이가 은퇴 회견에서 눈물을 흘릴 때 너무 안타까웠다. 혼자 남은 요즘은 많이 외롭고 쓸쓸하다”고 했다.

○ 개인보단 팀을 위해

송지만도 지난해 은퇴 위기를 맞았다. 지난해 발목 골절을 당해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칠 기회가 없었다. 시즌 후 팀은 은퇴를 권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이렇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2억5000만 원에서 무려 1억7000만 원이 삭감된 8000만 원에 재계약을 하고 유니폼을 계속 입기로 했다.

그는 “처음 프로에 입단했을 땐 딱 5년만 버티자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오게 됐다. 이 나이에 개인 성적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다. 팀의 부족한 곳을 메우는 선수로, 후배들에게는 좋은 선배로 팀의 4강 진출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송지만#황금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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