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Let’s Go Baseball] LG 구단주 “미국으로 전훈 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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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12일 07시 00분


아날로그 시대의 해외전훈

에이스 김용수, 좁은 좌석 탓 허리 이상
박철순·김상훈, 훈련 중 부상 불상사도

원년 우승 OB, 비자 때문에 미국 못 가
현찰 싸들고 출국…외화 밀반출 혐의도


2013시즌의 개막은 아직 멀었지만, 선수들에게는 이미 시즌이 시작됐다. 1월 합동훈련 돌입에 이어 해외전지훈련이 펼쳐진다. 여기서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눈을 사로잡아야 주전으로 시즌을 맞이할 수 있다. 프로야구가 처음 해외로 전훈을 떠난 것은 1983년이었다. 원년 우승팀 OB가 6개 팀 가운데 가장 먼저 대만 전훈을 실시했다. OB는 일본으로 장소를 옮겨 2차 해외전훈을 소화했다. 나머지 팀은 모두 일본으로 갔다. 이후 괌, 사이판, 필리핀으로 훈련장소를 넓혀왔고 1985년 삼성이 미국 플로리다 다저타운에 가면서 처음으로 메이저리그와 접촉했다. 교육리그의 영향으로 한동안 미국 애리조나와 플로리다가 각광을 받았고, 하와이도 단골 전훈지가 됐다. 지금은 일본 오키나와를 많이 찾는다. 거리가 가깝고, 연습경기 파트너도 많아서다.

○달나라 가기보다 힘들었던 해외전훈

초창기 해외전훈은 프런트에게 엄청 큰일이었다. 선수지원부서가 모두 매달려 3개월 이상 준비해야 가능했다. 선수들이 해외에 나가기 위해선 서울 남산에서 안기부가 마련한 소양교육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선수들은 신원조회도 통과해야 했다. 군 미필자가 대부분이어서 병무청으로부터 해외여행 허가서도 필요했다. “선수당 서류가 십여 개 이상 필요했다”고 구경백 당시 OB 매니저(현 일구회 사무총장)는 기억했다. 게다가 단체로 서류를 준비했기에, 한 선수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작업이 중단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OB는 당초 미국으로 전훈을 계획했다. 원년 우승 후 축승회에서 선수들이 “미국”을 외쳤고, 박용곤 구단주도 미국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행 비자를 받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쉬운 곳으로 방향을 틀어 대만과 일본으로 갔다.

○시행착오 많았던 초창기 해외전훈

초창기 해외전훈은 선수와 구단에게 별천지였다. 좋은 시설과 선수 위주의 극진한 대우, 단 1분도 쉬지 않고 훈련하는 일본 선수들의 모습은 구단과 선수 모두에게 자극제가 됐다. 구단은 1년 내내 선수에게 투자하지만, 전훈 기간 동안 가장 잘 먹이고 편하게 해주고 훈련도 잘 시켜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관련한 에피소드 하나. 초창기 해외전훈 도중 휴식 때는 선수들에게 돈을 줬다. 현지 숙소와 식당 직원들에게도 휴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자 원하는 밥을 사 먹으라고 선수들에게 지급한 돈은 다른 데 쓰였다. 몇몇 선수들은 돈을 아낀다며 숙소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다른 선수들은 파친코에서 게임을 하느라 다 써버렸다. 역효과가 났다. 결국 없던 일이 됐다.

해외전훈에는 돈이 많이 든다. 요즘은 10억원대지만, 초창기에도 1억원 이상을 썼다. 카드도 사용하지만 현지에서 움직이다 보면 현찰이 필요했다. 귀한 달러나 엔으로 바꿔서 출국했다. 그러다보니 사고도 많았다. 매니저는 전훈 비용을 현찰로 들고 갔다.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하는 현찰가방이었다. 간혹 공항에서 X레이 투시기에 걸려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은 구단도 생겼다. 그나마 프로야구단의 특수한 사정을 설명하면 국내서는 문제가 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선 달랐다. 출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매니저는 선수들에게 그 돈을 조금씩 나눠줬다.

○눈물의 대만, OB 박철순·해태 김상훈의 사연

스프링캠프 최대의 적은 부상이다. 다쳐서 훈련을 못하고 돌아오면 선수도 아프지만, 구단은 더 아팠다. 1983년 스프링캠프 최대의 화제 인물은 OB 박철순이었다. 원년 스타 박철순이 대만에서 전훈을 하다 몰래 사라졌다. 1982년 한국시리즈를 위해 진통제를 맞는 등 무리를 했던 박철순은 서울 명일동 OB 연수원에서 진행된 훈련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요즘처럼 재활의학이 발달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박철순은 결국 대만 전훈 도중 탈이 났다. 아무도 몰래 귀국 비행기를 탔다. 구단은 당시 현지에 있던 취재진에게 “박철순이 미국에 둔 짐을 가지러 갔다”고 돌려댔으나, 세상에 비밀은 없었다.

1994년 해태 김응룡 감독은 대만 전훈에서 낭패를 봤다. 한대화의 맞트레이드 상대로 데려온 김상훈 때문이었다. 김 감독이 그렇게도 원했던 왼손 거포였다. 훈련도 잘 마쳤다. 귀국하기에 앞서 대만 프로팀과 연습경기를 치렀는데, 여기서 사단이 났다. 적시타를 치는 등 큰 활약을 펼쳤던 김상훈이 홈에 뛰어들다 상대 포수와 충돌하면서 어깨를 다쳤다. 김상훈은 반 시즌 이상을 쉬어야 했고, 그것으로 해태의 시즌은 끝나고 말았다.

LG는 1992년 이후 미국 본토로 가지 않는다. 에이스 김용수가 훈련을 잘 마치고 돌아온 뒤 허리에 이상이 생겨 반 시즌을 놀았다. 비좁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장거리 비행을 했던 후유증이었다. 그 보고를 받은 구본무 당시 LG 구단주는 “두 번 다시 미국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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