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Let’s Go Baseball] 관중석은 여인천하…육두문자 대신 “옵빠”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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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8월 4일 07시 00분


1994년 잠실야구장의 모습. 당시만 해도 야구장을 찾는 이들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야구장은 남성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과열된 응원,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팬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스포츠동아DB
1994년 잠실야구장의 모습. 당시만 해도 야구장을 찾는 이들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야구장은 남성들의 모임 장소였으며 과열된 응원,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는 팬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스포츠동아DB
세월따라 변한 프로야구 관중석 풍경

향우회 같았던 초창기, 응원전도 과열
잦은 난동에 사직구장엔 비밀요원 까지

치어리더, 새로운 야구한류 자리매김
젊은층·여성팬 야구응원 주류로 부상


프로야구에서 초창기와 가장 달라진 곳은 관중석이다. 젊어졌다. 화사해졌다. 여성 팬들이 엄청 늘었다. 술 취한 관중의 저질스런 응원과 욕설, 그라운드 난입과 같은 난동에 익숙하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졌다. 열린 공간을 좋아하는 젊은 세대와 여성의 등장으로 야구장이 환해졌다. 야구선수들은 아이돌 가수처럼 개인적으로 큰 인기를 누르고 있다. 그 덕분에 프로야구는 야구 전쟁에서 야구 엔터테인먼트산업으로 변신했다.

○초창기 관중석 풍경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위해 만들어진 잠실구장이 개장하기 전인 1982년 서울의 프로야구 경기는 동대문구장에서 열렸다. 도시락을 싸가며 아마추어야구를 보던 골수팬들이 동대문으로 몰렸다. 지역 연고제에 바탕을 둔 프로야구. 초창기 관중석은 향우회 모임 같았다. 고향 선후배, 모교 동창들을 만나는 장소였다. 당연히 ‘우리 팀’이 이겨야 했다. 경기가 과열됐고 응원이 뜨거웠던 이유다.

극성팬이 많기로는 MBC 청룡이었다. 1990년 LG로 넘어가면서 잊혀졌지만 개성 강한 선수도, 감독도 많았던 화제의 팀이었다. 특히 목청 좋은 골수팬이 있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욕설 응원은 상대팀 선수단이 심판에게 하소연을 할 정도로 대단했다.

1982년 대전에서 시작해 1985년 서울로 옮겨 한동안 동대문구장을 사용한 OB는 유흥업소 종업원들이 많이 응원했다. 당시 선수들은 메리트시스템에서 번 돈으로 밤마다 술집과 나이트클럽을 찾았다. 프로야구선수에 대한 인기도 높고, 돈도 많다고 알려진 때였다. 선수들은 단골 웨이터들과 쉽게 안면을 텄다. 그 다음 단계는 외상. 선수들을 상대로 영업과 외상대금 수금을 위해 경기장을 찾았다가 야구의 매력에 빠져 골수팬이 된 이들도 많았다.

2000년대 들어 야구장에 ‘여성시대’가 도래했다. 선수들에 대한 센스 있는 응원문구는 물론 개성 있는 의상으로 눈길을 끄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여성들은 이제 프로야구의 주 고객층으로 자리 잡았다. 스포츠동아DB
2000년대 들어 야구장에 ‘여성시대’가 도래했다. 선수들에 대한 센스 있는 응원문구는 물론 개성 있는 의상으로 눈길을 끄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여성들은 이제 프로야구의 주 고객층으로 자리 잡았다. 스포츠동아DB


○경기장마다 관중의 특성이 달랐다!

극성스럽기는 광주였다. 군사정권이 남긴 상처가 컸기에 해태 팬들은 야구를 그냥 경기로 보지 않았다. 한을 풀어줄 대상이라고 여겼다. 1982년 광주 개막경기 때 마이크를 잡은 고 김동엽 감독. “여러분의 한을 우리 해태가 풀어주겠습니다”라고 외쳐 주위사람들을 기겁하게 했다. 군사정권 때 해태는 5월 그날이 되면 원정을 떠났다. 당국이 광주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목포의 눈물’을 부를 때 눈치를 봐야했던 시기다. 해태 팬들은 1983년 삼미가 2.5게임차를 안고 광주 원정 3연전을 왔을 때 홈 어드밴티지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삼미의 원정숙소로 몰려가 밤새도록 괭가리를 치며 선수들의 잠을 깨웠다. 원정팀에 광주는 공포의 경기장이었다.

부산은 구덕구장 시대와 사직구장 시대로 팬이 구분된다. 구덕구장은 일본프로야구를 보고 즐겼던 수준 높은 팬들이 찾던 우아한 곳. 대신 담장이 낮아 팬들의 담치기가 많았다. 사직구장은 경기가 끝나면 관중의 난동으로 자주 소란스러웠다. 1988년에는 상대팀 원정버스와 몸싸움을 하다 사망사고가 났다.

사직구장 개장 초창기 몇몇 저질 팬들이 관중석에서 난동을 부리자 롯데는 특단의 대책을 내놓았다. ‘돌풍’이라는 별명의 롯데 프런트는 관중석에 숨어 있다가 난동관중이 나오면 조용히 다가가 무력으로 제압했다. 요즘 ‘지구상 최대의 노래방’으로 변신해 부산의 명물이 된 사직구장만을 아는 팬들에게는 1980년대 후반 사직구장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치어리더들의 존재는 이제 프로야구 응원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사진은 응원을 펼치고 있는 LG 치어리더들의 모습. 스포츠동아DB
치어리더들의 존재는 이제 프로야구 응원문화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사진은 응원을 펼치고 있는 LG 치어리더들의 모습. 스포츠동아DB


○치어리더의 등장, 화려해진 1990년대 한류 야구문화의 탄생

LG가 프로야구 전면에 나서면서 가장 달라진 것은 치어리더의 도입이다. 치어리더들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덤벼드는 팬들 때문에 소동이 벌어진 적이 많았다. 좀더 야구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한때 응원단과 함께 외야로 밀려난 적도 있었다. 1991, 1995년 벌어진 한·일 슈퍼게임을 앞두고 잠실구장을 찾았던 일본의 야구기자는 “나이트클럽과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너무 역동적이고 흥겹다”고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우리가 보여준 길거리 응원은 월드컵에서 새로운 응원문화를 창조했다. 모든 이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응원하는 지금 우리 야구장의 뜨거운 응원은 메이저리그와 일본의 야구장에선 볼 수 없는 한류 야구문화의 탄생이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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