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육상]한번만 더 날자꾸나, 그렇게 되뇌었건만… 女장대높이뛰기 ‘미녀새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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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8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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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바예바 노메달 수모… 지난 대회 예선탈락 설욕 실패

장대를 박스에 꽂는 순간부터 3초 남짓. 짧은 시간이지만 하늘을 난다. 잔뜩 웅크렸던 막대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면서 막대의 주인은 날갯짓을 시작한다. 장대높이뛰기는 스피드, 민첩성, 근력, 균형감, 점프력, 악력 등 육상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갖춰야 한다. 육상의 종합선물세트다. 상체와 하체가 균형 있게 발달해야 하고 팔다리가 길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갖췄고 외모도 수려했다. 게다가 밥 먹듯 세계기록을 갈아 치우는 그를 사람들은 ‘미녀새’로 불렀다.

‘미녀새’가 추락했다. 옐레나 이신바예바(29·러시아)는 30일 대구스타디움에서 열린 여자 장대높이뛰기 결선에서 4.65m로 6위에 그쳤다.

2003년 4.82m를 날아오르며 첫 세계기록을 세운 그는 2005년 여자 처음으로 5m(5.01m)를 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세계기록을 5.05m로 바꾸며 금메달을 딴 이신바예바는 2009년 5.06m까지 솟구치며 27번째 세계기록(실내 12개 포함)을 달성했다. 올림픽에서 2개, 세계선수권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그에게 2009년 베를린 세계선수권은 악몽이었다. 2003년 파리 세계선수권 이후 6년 동안 정상을 지켰던 그가 결선에도 오르지 못했다. 지난해에도 부진은 이어졌고 올 시즌 최고기록도 4.76m로 좋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그가 다시 날아오르리라 믿었다.

이날 대구스타디움에 선 그는 언제나처럼 다른 선수들이 경기를 시작할 때 수건을 얼굴에 덮은 채 트랙에 누웠다. 가끔 일어나 몸을 풀었지만 이내 또 누웠다. 4.30m에서 시작한 바의 높이가 4.65m가 됐을 때 비로소 장대를 잡았고, 첫 번째 시도에서 가뿐하게 바를 넘었다. 그게 유일한 성공이었다. 4.70m를 건너 뛴 이신바예바는 4.75m 1차 시도에서 실패한 뒤 4.80m에 도전했지만 주어진 기회를 모두 놓쳤다.

이신바예바는 탈락이 결정된 뒤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연예인처럼 웃었지만 얼굴의 그늘까지 가리지는 못했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일에 익숙했던 그는 푸른색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서성이다 조용히 스타디움을 빠져 나갔다. 여제(女帝)답게 품위를 잃지 않았던 그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이신바예바가 떠난 자리를 마지막까지 지킨 선수는 브라질의 파비아나 무레르(30)였다. 그는 개인 최고 타이인 4.85m를 넘어 대구의 별이 됐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레르는 ‘브라질의 이신바예바’로 불리는 남미 최강자다. 172cm, 64kg의 체격에 얼굴도 예뻐 모델 제안이 잇따를 정도다. 이신바예바처럼 원래는 체조선수였다 키가 계속 자라는 바람에 장대높이뛰기로 전향했다. 2005년 헬싱키 세계선수권에서는 예선 탈락했지만 2007년 오사카 대회 6위, 2009년 베를린 대회 5위로 점차 순위를 끌어올렸고, 지난해 세계실내선수권에서 첫 메이저대회 우승의 기쁨을 맛본 뒤 마침내 대구에서 세계선수권 3전 4기에 성공했다.

무레르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결선에 올랐지만 대회 조직위원회의 실수로 장대를 잃어버리는 불운을 겪은 적이 있다. 조직위 측이 마련해 준 다른 장대로 경기에 나섰지만 손에 익지 않은 무기로 제 실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평소 자신이 쓰던 장대보다 더 길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야구선수가 무거운 고교 선수 배트를 사용한 격이었다.

그는 4.45m의 한심한 기록으로 10위에 그쳤다. 브라질 정부는 올림픽이 끝난 뒤 무레르를 위로하기 위해 그에게 특별상을 수여했다. 무레르는 이날 우승으로 자신을 격려해줬던 조국에 세계선수권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겼다.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고개를 숙인 무레르와 바로 그 대회에서 세계기록으로 우승하며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았던 이신바예바. 대구에서 둘의 운명은 바뀌었다. 이신바예바는 내년 런던 올림픽에 이어 2013년 자국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에서 명예롭게 은퇴할 계획이었지만 실현을 장담하기 어렵게 됐다. 이신바예바는 공동취재구역을 빠져나가며 “장대가 너무 소프트했다. 더 딱딱한 것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결과에는 후회가 없다. 지금 머리가 텅 빈 것 같다. 난 아직 배가 고프다”며 부활을 다짐했다. 추락한 ‘미녀새’가 다시 가장 높이 날려면 ‘브라질의 이신바예바’부터 넘어야 할 것 같다.

대구=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알고보면 더 재미있는 장대높이뛰기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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