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일의 ‘내사랑 스포츠’]액션 영화 주인공 보다 더 화려했던 최고의 파이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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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9일 10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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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일은 1965년 한국 복싱 사상 처음으로 세계타이틀 매치를 가졌다.  동아일보DB
서강일은 1965년 한국 복싱 사상 처음으로 세계타이틀 매치를 가졌다. 동아일보DB

1959년 경기 안양시의 안양천 다리 밑. 가냘프게 보이는 한 소년이 양아치 10여명을 상대로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혼자서 10명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그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전율을 일으키게 할 정도였다. 몰려든 패거리들을 번개 같은 속도로 치고 빠지는데, 그 솜씨는 보는 이의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어느 새 10명을 때려누이고 손을 툭툭 털며 다리 위로 올라오는 그를 잡는 한 신사가 있었다. 그 신사야말로 한국 복싱 사상 최고의 트레이너로 꼽히는 김준호.

한국 프로 복싱 사상 타이틀전을 거친 최초의 챔피언이기도 했던 김준호는 당시 현역에서 은퇴하고 막 트레이너 생활을 시작할 때였다.

"안양에 싸움을 기막히게 잘하는 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한 달음에 안양천을 찾았다가 1대 10의 격투를 본 것이었다.

"너 권투 한 번 안 해볼래?" 김준호는 이 소년에게 복싱을 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거칠게 나오던 이 소년은 김준호의 제안을 어쩐 일인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서울로 올라 온 소년은 김준호의 집에서 기숙하며 서울 체육관에서 프로 테스트를 받아 합격한다.

서강일은 한국 복싱 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린다.  동아일보DB
서강일은 한국 복싱 사상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불린다. 동아일보DB
18살의 나이에 프로 복싱선수가 된 이 소년. 소년은 '이 세상에 센 놈은 하나밖에 없다'라는 뜻의 '강일(强一)'이라는 이름을 원래 이름인 대안(大安) 대신 사용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한국 복싱 사상 '가장 완벽한 테크니션'으로 불리는 서강일이다.

서강일은 일본의 복싱 전문지가 선정한 '세계 100인의 명복서' 52위에 랭크돼 있다. 이 때까지 이 잡지에 선정된 한국 선수는 단 2명. 김기수와 서강일 뿐이다. 서강일은 한국 최초의 세계 챔피언 김기수보다도 순위가 앞선다.

또한 서강일은 한극 프로 복싱 사상 첫 세계 타이틀 매치에 나선 선수다. 1965년 12월 4일 필리핀의 케손시 아라네타 체육관.

당시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랭킹 1위에 올라 있던 서강일은 챔피언인 필리핀의 플래시 엘로르테와 세계 챔피언 벨트를 놓고 맞붙는다.

서강일은 이날 15라운드를 통해 상대의 가벼운 유효타를 몇 번 허용했을 뿐, 상대의 한 방을 잘 피해내며 엘로르테의 안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우위를 보였다.

하지만 주심은 3라운드와 7라운드에 서강일의 버팅을 이유로 두 번이나 감점을 줬다. 결국 전원 필리핀 사람으로 구성된 주심과 2명의 부심은 전원일치로 서강일의 판정패를 선언했다.

이튿날 필리핀의 신문들도 일제히 '떳떳하지 못한 챔피언의 승리'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후 서강일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에서도 활약했고, 세계 챔피언과 벌인 세 번의 논타이틀전에서 모두 승리하고도, 두 차례의 세계 타이틀전에서는 안타깝게 패하는 등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무관의 제왕'으로 불렸던 서강일. 175㎝의 날렵한 체격의 그는 원투 스트레이트, 엎어 컷, 훅 등에 모두 능란했다.

아웃복싱을 구사하다가도 한번 폭발하면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도전적이었다. 이런 서강일의 복싱 센스와 도무지 잡히지 않는 번개 같은 스피드는 어려운 시절 길거리 생활을 하며 단련된 것.

1960년대 대중의 스타였던 서강일은 '한국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신성일 씨와도 의형제를 맺고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신성일 씨가 모 일간지에 연재하고 있는 자전적 수기를 보니 서강일 씨의 '싸움 실력'에 이 영화계의 슈퍼스타도 무척 놀랐던 것 같다.

내용은 신 씨와 서강일 씨가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건달 5명과 시비가 붙었는데, 서 씨가 주차장의 넓은 공간에서 5명을 순식간에 제압했다는 것. 신성일 씨는 "서강일이 번쩍하자 건달 다섯이 쓰러졌다"며 "이렇게 싸움을 잘하나"라며 속으로 감탄했다고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슈퍼스타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서강일. 이런 선수가 자꾸 나와야 한국 복싱이 다시 살아나지 않을까 싶다.

권순일 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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