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IOC에선 아직 ‘기테이 손’이라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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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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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넘게 손기정 국적회복 운동 펼치는 박영록 前의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를 한국인 손기정이 아닌 일본인 기테이 손으로 소개하고 있다. IOC 홈페이지 캡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를 한국인 손기정이 아닌 일본인 기테이 손으로 소개하고 있다. IOC 홈페이지 캡처

1970년 광복절인 8월 15일 독일 베를린 올림피아 스타디움. 한국의 한 국회의원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사다리에 올랐다.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 가져온 장비를 꺼내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념탑에 새겨진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국적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꿨다. 저팬을 떼고 코리아를 새기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워낙 공을 들였기에 경기장 직원들도 모르고 있다 뒤늦게 경찰에 신고해 불법 침입 및 공공재산 파괴 혐의로 체포령까지 내렸으나 그는 이미 독일을 떠난 뒤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빌리 브란트 총리가 이끌던 서독 정부는 “국적 변경은 불가능하다”며 저팬으로 환원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정과 끌 등을 다 갖고 갔어요. 가서 보니 생각보다 높아 사다리만 구입했죠. 밤 12시 무렵 시작했는데 어느새 동이 트더군요.” 긴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던 그의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날의 기억만큼은 또렷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현실에서는 아직 미완성이다. 41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변한 게 없다. 4선 국회의원 출신 박영록 전 의원(89)이 2002년 세상을 뜬 손기정의 국적 회복에 여전히 매달리는 이유다.

강원 고성에서 태어난 박 전 의원은 “일본 학교에 들어가야 면서기라도 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혼을 뺏길까 싶어 서당을 다녔다. 마라톤을 했고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 등을 통해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았다”고 손기정과의 인연을 털어놓았다.

정치에 입문한 후 1960년대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3개월 해외연수를 갔을 때 베를린의 기념탑에 손기정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뒤 바로잡을 결심을 했다.

“베를린에서 국적을 고치고 귀국했는데 김포공항에 손기정도 나왔어요. 손기정이 그러더군요. 우리 부모는 나를 낳아주신 분이며 박 의원 부부는 한국인 손기정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다고.”

그러나 야당 의원이던 그의 이런 활약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여당 및 정부의 비협조와 국제사회의 이해 부족으로 손기정의 국적을 제자리로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미운털이 박혀 범법자 취급까지 하더군요. 일본도 한국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면 도와주겠다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홈페이지에 손기정의 국적이 일본으로 돼 있어 논란을 일으켰다. 현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에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는 일본의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돼 있다.

박 전 의원은 “국적 회복을 기원하는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사절단을 구성해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에 파견하겠다. 국내 체육계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강원 평창이 2018년 겨울올림픽 유치경쟁에 뛰어들면서 IOC와도 빈번히 접촉하고 있는 만큼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정계 은퇴 후 2004년부터 4.96m²(1.5평) 남짓한 컨테이너에 살아 청렴 정치인으로도 널리 알려진 박 전 의원은 “손기정을 떳떳한 한국인으로 만들어야 한이 풀릴 것 같다. 여생의 유일한 목표다. 그래야 손기정도 편히 눈을 감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전 의원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대한체육회의 한 관계자는 “다른 식민지 국가와의 형평성과 IOC 규정 등을 감안하면 쉽지는 않다. 손기정의 국적이 일본으로 더는 나오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해야 할 상황”이라고 밝혔다. 배종신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은 “해야 할 일인데 어려움이 많다. 과거사 해결 차원에서 한일 간 합의를 거쳐 IOC에 정정 요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종석 기자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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