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내만 내던 ‘두루뭉술 선수’서… 육상 10종경기 ‘10년 간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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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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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 외로운 1인자 김건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거짓말이었다. 김건우(31·문경시청·사진)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육상을 시작했다. 육상부였던 세 살 위 누나를 기다리다가 얼떨결에 육상부에 들어갔다. 모여서 체조하고 운동장을 천천히 뛰는 정도였다. 계속할 마음이 없었는데 중학교 입학 후 육상부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안 하면 선배들이 괴롭힌다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다. 달리기는 재밌었지만 하면 할수록 실력은 별로라는 걸 깨달았다. 이렇다 할 성적이 안 나오자 다른 종목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농구, 골프 그리고 윈드서핑까지.

○ 미친 짓, 그리고 기적

고교 입학 후에도 나아진 건 없었다. 1학년 때 대회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세단뛰기로 종목을 정한 2학년 때는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실격이었다. 3학년 1학기 때 출전한 두 대회 역시 실격.

“속된 말로 ‘삐꾸’였죠.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 3학년 여름에 감독님이 그만두라고 했고 저도 그게 맞겠다 싶었어요.”

운동을 접고 뒤늦게 공부하겠다고 교실에 앉았다.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친구들이 보였다. 한 번만 더 해보자 싶어서 코치를 찾아가서 애원했다. 코치는 “너는 잘하는 건 없고 조금씩 흉내는 낼 줄 아니 10종경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감독은 “다른 선수들한테 방해되지 않게 하라”고 했다.

10종 훈련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돼 추계 중고대회에 나갔다. 종목 순서도 헷갈리는 상태였다. 둘째 날 장대높이뛰기에서 3.20m를 신청했다. 자신의 최고 기록은 2.70m. 코치는 뒤늦게 제자의 ‘미친 짓’을 알고 담배만 피워댔다. 1, 2차 모두 당연히 실패한 후 마지막 시도. 장대를 꽂고 올라가는데 이미 발부터 장대에 걸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넘었지만 바를 건드렸다.

‘안 되는구나, 난 역시. 끝났구나, 육상 인생도.’ 서러움을 매트에 묻고 있는데 코치가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위를 보니 바가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규정상 바가 떨어지기 전에 매트에서 나오면 기록 인정이었다. 김건우는 그날 3.80m까지 넘었다. 최종 결과는 고교 신기록으로 우승.

“첫 메달을 받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떨려요. 지금까지 많은 메달을 받았지만 그때의 짜릿함과는 비교가 안 돼요. 기적이 일어난 거죠.”

○ 1인자, 그리고 8000점

1997년 가을, 기적처럼 김건우의 인생은 바뀌었다. 이듬해 꿈에 그리던 한국체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3학년 때인 2000년부터 성인 무대를 평정했다. 그해부터 2007년까지 전국체전 8연패. 국내에서 그를 따라올 적수는 없었다.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에서는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독주. 2008년 1월 족저근막염이라는 부상이 찾아왔다. 도약할 때 쓰는 왼발 뒤꿈치가 너무 아팠다. 새벽에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처음 발을 댔을 때의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지만 쉽게 낫지 않았다. 주위에선 은퇴를 권했고 그 역시 매일 밤 고민했다. 부모님이 떠올랐다.

또 하나, 국내 1인자가 된 이후 그를 미치게 만든 숫자 ‘8000점’이 다시 일어서게 했다. 한국 신기록이자 그의 최고 기록은 7824점. 아시아 기록 8725점, 세계 기록 9026점과는 격차가 있다. 그는 마의 8000점을 넘어 세계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리고 2010년 그는 2년여의 부상을 딛고 돌아왔다. 전국체전에서 다시 1위를 차지했고 11월 광저우 아시아경기에서 7808점으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국내에서는 육상에 10종경기라는 종목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끊임없이 뛰고 날았다.

김건우의 눈은 8월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로 향한다. 최근 국제대회에서 10종경기의 입상권 점수는 8400점 내외. 그는 한국 최초로 8000점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적 선수들과 메달 경쟁을 하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아직도 10종경기를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부족한 게 많은 만큼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죠. 쉴 시간도 아플 시간도 없어요.”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10종경기::

첫날 100m 달리기, 멀리뛰기, 포환던지기, 높이뛰기, 400m 달리기에 이어 둘째 날 110m 허들, 원반던지기, 장대높이뛰기, 창던지기, 1500m 달리기를 한 뒤 각 종목 점수를 합친 총점으로 순위를 가리는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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