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 기자가 간다] 어설픈 칼질…“소가죽 대신 손가죽 자를라”

  • 입력 2009년 9월 16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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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글러브의 비밀을 아시나요? 포지션따라 취향따라 크기 다르죠

모양·사이즈 맞춤형 글러브 위해 선수들 손그림 팩스로 받는다네요

야구에서 야수들이 실책을 한 뒤, 가장 많이 하는 행동 중 하나는 글러브 만지작거리기다. 여기에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까지 더하면 ‘글러브 탓하기’ 포즈 완성. 이럴 때마다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다. 실책을 한 선수보다 더 가슴을 졸이는 이들은 글러브를 만드는 장인. “자기가 잘못해 놓고는….” 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속담은 ‘서툰 목수가 연장 탓 한다.’ 국내 최대의 글러브 제조업체인 브라더스포츠 김규한(51) 사장은 “딱 하루만 글러브를 만들어 보면, 우리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사동에 위치한 브라더스포츠를 찾았다.

○혼과 땀이 깃든 열정의 결정체

‘형제들의 혼과 땀이 깃든 열정의 결정체.’ 브라더스포츠 홈페이지(http://bbrother.net)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글귀다. 브라더스포츠는 회사명 그대로 형제들의 손으로 운영된다. 맏형이 김규한 사장, 김정한(44) 공장장은 둘째다.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 그리고 형제들의 부인까지. 총 7명이 직원의 전부다. 김 사장은 “가족들이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기 때문에 품질이 우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계화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아직 글러브제조는 사람의 손이 많이 간다. 40만원대 고가 글러브는 하루 10개를 만들기도 빠듯하다. 2008베이징올림픽과 2009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이후 늘어난 글러브 수요. 이미 연말까지 주문이 꽉 차있다. 하지만 인력충원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김 사장은 “요즘 젊은 친구들이 배우기 힘든 일을 꺼리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덕분에 브라더스포츠의 노동 강도는 상상초월. 오전9시에 출근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하는 일이 잦다. 김 공장장은 “오늘 잘 배워두면 나중에 우리 회사에 취직시켜 주겠다”며 웃었다.

○최고의 원피는 어린송아지 등가죽, “품질 위해 원가절감은 포기”

브라더스포츠는 이대호(27·롯데)와 서재응(30), 장성호(32·이상KIA) 등의 글러브를 연간 2개 이상 스폰서하고 있다. 쿠바와의 베이징올림픽결승전 때 포수 강민호(24·롯데)가 광속(光速)으로 집어던졌던 바로 그 미트(포수용 글러브) 역시 브라더스포츠의 작품. 선수용 제품은 가죽부터 최고의 품질만을 고집한다. ‘킵(kip)’이라고 불리는 어린 송아지 가죽이 원재료. 미국에서 생산하고, 일본에서 가공한 것으로, 쭈글쭈글한 뱃가죽보다는 팽팽한 등가죽이 1등급이다. 킵보다 한 단계 아래가 스테어(stter)라고 불리는 수소가죽.

“얼굴 한 번 대보세요.” 킵은 양탄자처럼 보송보송. 좋은 가죽일수록 더 가벼우면서도 질기다. 김 공장장은 “만드는 것 역시 양질의 가죽일수록 편하다”고 했다. 15평(49.5m²)의 킵에서 나오는 글러브는 단 3개뿐이다. 워낙 고가의 가죽. 억지로 만들면 1개가 더 나오지만, 품질을 위해 과감하게 포기한다.

선수의 손 모양과 크기를 정확히 알아야 맞춤형 글러브가 탄생한다. 공장에는 강귀태(30·히어로즈)를 비롯해 선수들이 팩스로 직접 보내 온 손 모양 그림들이 있었다. 글러브가 너무 크면 글러브 안에서 손이 헛돌고, 너무 작으면 불편하다. 김 공장장은 “대체적으로 손이 작은 선수가 글러브에 예민하고, 포지션별로는 특히 포수가 민감하다”고 했다. 가장 글러브를 보는 눈이 까다로운 선수는 포수 최기문(36·롯데).

○위험천만…“소가죽은 안 잘려도 사람 가죽은 잘 잘려.”

글러브는 포지션별로 모양과 크기, 무게가 다르다. 공을 빨리 빼야하는 내야수의 글러브가 외야수 글러브보다 작고, 내야수 중에서도 핫 코너(1·3루)를 맡는 야수의 글러브가 더 크다. 보통 2루수 글러브의 크기는 11.25인치, 유격수는 11.5인치, 3루수는 11.75인치. 투수는 12인치, 1루수와 외야수는 12.75인치다. 포수미트는 길이는 11.75인치로 3루수글러브와 비슷하지만, 무게는 약 760g으로 가장 많이 나간다. 같은 포지션이라도 선수마다 글러브 크기에는 차이가 있다. 김 공장장은 “이대호는 다른 1루수보다 0.25인치 정도 큰 미트를 선호한다”고 했다.

투수·올라운드 용 글러브를 만들기로 결정. 원피를 재단하는 것으로부터 공정이 시작된다. 글러브는 가죽조각을 끈으로 엮어서 만드는 것이 기본. 김 공장장이 칼을 대자 ‘뚝딱’ 16개의 가죽조각들이 탄생했다. “제가 한 번 해 볼게요.” 아예 가죽이 잘 잘려나가지도 않는다. 칼끝에 힘을 주다가 칼이 튀어나갔다. 하마터면 손을 재단할 뻔. 김 공장장은 “칼이 소가죽에는 잘 안 들어도 신기하게도 사람 가죽에는 잘 든다”며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내피는 손목부분의 양털까지 8조각. 손바닥과 가죽이 닿는 부분은 부드러운 촉감의 사슴피를 쓴다. 손가락 부분을 뻣뻣하게 고정시키는 합성수지 재질의 펠트(felt) 7조각까지 더하면, 총 31개(외피16+내피8+펠트7)의 조각들이 나온다. 가죽조각에 끈을 끼울 구멍 약 200여 개까지 뚫으면, 1차 공정 종료. 벌써 3시간 가까이가 흘렀다.

○장사는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레귤러 모델을 제외한 브라더스포츠 제품에는 ‘김규한 작(作)’이라는 낙관이 찍혀있다. 킵을 원피로 쓴 글러브에는 메이저오더(major order), 스테어를 원피로 쓴 글러브에는 스페셜오더(special order)라는 글귀가 추가로 들어간다. 김 사장은 “가족을 대표해 내 이름을 넣는다”면서 “품질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라고 했다.

아는 선수들은 글러브를 받으면 김 사장의 이름부터 확인한다. 낙관이 있어야 애프터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이 기계 조심하세요. 손 잘못 넣으면 맥주안주 됩니다.” 220도의 고열을 이용하는 마킹프레스(marking press)로 낙관을 새겼다.

가죽이 너무 두꺼우면 무겁고, 얇으면 금세 찢어진다. 외피 수구면(공이 박히는 부분)은 2.2-2.4mm를 유지해야 한다. 손등부분은 약 1.8mm, 공과의 마찰이 많은 엄지와 검지 부분은 2.0mm. 이 두께를 맞추기 위해 브라더스포츠는 독일에서 4000만원이 넘는 벤드나이프(bend knife)를 들여왔다.

다음은 봉제작업. 내피 봉제는 올케 김현미 씨가, 외피봉제는 시누이 김경화 씨가 사이좋게 담당한다. 재봉틀 앞에 앉았다. 하지만 무모한 도전이었다. 삐뚤빼뚤하게 나오는 재봉선. 결국 김경화 씨가 다시 재봉부분을 뜯어냈다.

이음새는 다소 울퉁불퉁하다. 망치로 두드린 뒤 다리미 기계에 꽂아 이음부분을 펴준다. 외피 안에 내피와 펠트를 삽입하고, 가죽 끈으로 손가락 사이를 연결하자 글러브의 형체가 드러났다. 망치로 글러브 안쪽을 때려 소위 ‘볼 집’을 만들고, 열풍기를 돌려 모양을 잡아주면 글러브 완성.

김 사장은 “글러브를 스팀 기에 넣거나, 물에 담갔다가 모양을 잡는 선수들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가죽이 망가져서 오래 못 쓴다”면서 “자연스럽게 캐치볼을 많이 하는 것이 길을 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어느덧 밤 9시. 불 켜진 창 밖으로 장인의 열정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내 이름을 새기는 순간 항상 다짐합니다. 이 세상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글러브를 만들겠다고요. 내 형제가 쓴다는 생각으로 가죽을 만집니다.” 장사는 이윤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 그렇게 브라더스포츠의 형제들은 야구선수들과도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

부산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박화용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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