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철 양궁 감독 “독이된 활, 그러나 활 때문에 산다”

  • 입력 2008년 10월 15일 08시 58분


“(주)현정(26·현대모비스)이가 이겨야 하는데….” 여자양궁대표팀 문형철(50·예천군청) 감독이 나지막이 되뇌었다. 7월17일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앞 평화의 광장. 대한양궁협회에서는 ‘미디어 및 소음 적응훈련’을 실시했다. 여자개인전 결승은 주현정과 윤옥희(24·예천군청).

당시 여자대표팀의 에이스 박성현(25·전북도청)은 4차 월드컵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고, 윤옥희는 2·3차 월드컵 개인전 정상에 섰다. 무게감으로 치자면 주현정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지상과제로 삼은 대표팀으로서는 주현정의 자신감 회복이 급선무. 문 감독에게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대표팀을 위해 소속팀 제자인 윤옥희보다 주현정의 승리를 바랬다. 결과는 주현정의 우승. “(윤)옥희한테는 절대로 얘기하면 안 됩니다.” 문 감독은 웃었다. 결국 그것은 윤옥희에게도 잘 된 일이었다. 박성현·윤옥희·주현정은 베이징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문 감독은 올림픽 기간 도중 갑상선암 3기임이 알려져 또 한번의 감동을 줬다. 9월23일. 경북 예천 진호국제양궁장에서 문 감독을 만났다. 언제나 그랬듯 후덕한 웃음이 만면에 가득했다.

○ 잃은 것은 건강, 하지만 양궁을 얻었다

제40회 남녀양궁종합선수권. 예천군청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문 감독은 “최선을 다해다”며 웃었지만 내심 씁쓸한 기색이 느껴졌다. 2007년 12월, 대표팀 건강검진 도중 발견된 암. 의사는 “갑상선 암의 주요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했다. 실업팀 지도자 생활만 25년 째, 자신의 건강과 양궁을 맞바꾼 셈이다.

4월, 대표선발을 위한 평가전이 한창이던 때. 문 감독은 항암치료를 위해 1주일 간 병원에 입원했다. 방사선치료를 위해 독방에 갇혀 있는 동안 문 감독의 손에 들린 것은 노트북 컴퓨터. 그곳에서조차 경쟁국가 선수들을 분석하고, 단체전 순서를 고심했다.

건강하게만 살아온 50년. 문 감독은 “하늘이 노랗다는 의미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부모님부터 자식까지. 곁에서 함께 한 사람들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올림픽은 코 앞. 지도자생활 내내 꿈꿔오던 경기를 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문득 25년 전. 예천 행 버스를 타던 때가 떠올랐다.

○ 25년의 열정, 지역감정도 뛰어넘다

문 감독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양궁을 시작했다. 못하는 운동이 없던 문 감독을 체육선생님들이 지나칠 리가 없었다. 최고는 아니었지만 실업팀(삼익악기)에 몸담을 정도로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군 제대 후 처음으로 지도자생활을 시작한 것은 수원 연무초등학교. 곧게 뻗은 팔, 탄탄한 골격, 반짝이는 눈빛까지. 눈에 들어온 두 어린이가 있었다. 문 감독이 처음으로 뽑은 두 선수는 1992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은경(36)과 2000시드니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오교문(36)이었다. 문 감독은 “둘 다 대성할 선수의 자질이 엿보였다”고 회상했다. 역으로 문 감독 역시 지도자로서의 안목이 있었다.

예천에 첫발을 디딘 것은 스물여섯 되던 해. 당시만 해도 지역감정의 벽 때문에 전북 부안 출신인 문 감독은 힘든 적응기를 보내야 했다. 실력으로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과의 나이차는 많아야 너 댓살. 숙소에서 같이 뒹굴며 청춘을 바쳤다. 지역체육인들이 먼저 문 감독을 알아봐줬다. 부인 전미연(46)씨를 만난 곳도 그곳.

그렇게 25년이 흘렀다. 현재 실업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문 감독의 제자는 여주군청 백웅기(47) 감독 등 10여명. 예천군청은 김수녕(2000시드니올림픽)과 장용호(2004아테네올림픽) 등 3회 연속으로 올림픽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한 팀이 됐다.

○ 외우지 말고 익혀라

양궁이론을 교조적으로 맹신하는 선수에게는 발전이 없다는 것이 문 감독의 지론. 문 감독은 일방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소크라테스처럼 문답법을 즐긴다. 자기에게 걸맞는 방법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식이다.

문 감독은 한국양궁의 기본 틀을 잡은 양궁 1세대다. 체계화된 훈련방법도 없던 시절. 좋은 자세는 서로 권해보고, 나쁜 자세는 지적하며 ‘신궁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래서 문 감독에게 이론서란 장자의 말처럼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이다.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관찰력이 뛰어나야 한다. 선수를 정확히 알아야 선수가 마음을 열고, 신뢰가 쌓여야 솔직한 문답법이 진행된다. 태릉선수촌에서 문 감독은 인터뷰 순번까지 정해 특정선수에게 집중되는 언론의 관심을 막았다. 선발전 때문에 예민했던 선수들은 ‘편애’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다. 선발전 내내 박성현·윤옥희·주현정은 모두 “감독님 말씀이라면 믿음이 간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양궁의 기술을 모두 책으로 엮어도 단시간 내에 한국양궁이 무너질 리는 없다. 책은 책일 뿐이니까. 지도자들이 그것을 선수들에게 체화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문 감독은 한국양궁의 저력이 바로 “지도자와 선수간의 신뢰와 토론”에 있다고 했다.

예천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사진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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