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와 고양이 술래잡기 게임”…AI채용에 취준생들 황당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1월 5일 21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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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 테스트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납니다.”

최근 기업 상당수가 실시하는 AI 활용 역량검사·면접을 수차례 치른 끝에 지난달 취업에 성공한 배모 씨(25)는 5일 “통과하긴 했지만 AI 검사·면접에서 ‘고양이 술래잡기’, ‘마법약 만들기’ 같은 황당한 게임을 하면서 이게 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배 씨가 언급한 테스트는 AI 평가 업체 한 곳에서 도입한 검사·면접 방식으로 일부 대기업 계열사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이 중 ‘고양이 술래잡기’는 가로세로 6칸씩인 네모 칸 안에 생쥐와 고양이가 순차적으로 등장했다가 사라지면 두 동물 모두 등장한 곳을 맞히는 방식이다. 평가 업체 측은 이 테스트를 통해 정보를 단기적으로 기억하고 이해하는 능력 등을 측정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제 공채시험에서 여러 차례 테스트를 치렀던 취업준비생 이모 씨(26)는 “실력이 바뀐 건 없는데 거의 다 맞을 때도 있고, 대부분 틀릴 때도 있다”며 “어떤 기준으로 뭘 평가한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같은 업체에서 도입한 테스트 ‘마법약 만들기’는 약초 배열을 순차적으로 보면서 어떤 물약이 나올지 예측하는 방식인데 취준생들은 “운에 따른 요소가 지나치게 크다”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 신입사원을 채용하면서 AI를 활용한 역량검사·면접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급증하는 추세인데 상당수의 취준생은 ‘깜깜이 채용’이라며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직무와의 연관성이 낮고, 어떤 역량을 키워야 점수를 높일 수 있는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 “무표정으로 컴퓨터와 가위바위보 연습”
AI 역량검사에 10여 차례 응시한 이현승 씨(26)는 컴퓨터와 수십 번 가위바위보를 하며 승부 결과에 따른 얼굴 반응을 체크하는 테스트가 가장 황당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테스트 과정에서 표정이 녹화되고, 점수에도 반영된다고 하는데 유튜브 등을 찾아보니 ‘무표정이 가장 좋다’고 하더라”며 “무표정으로 컴퓨터와 가위바위보하는 연습을 수백 번 했다”고 말했다. 이 씨는 “AI 테스트에서 탈락하면 허탈감이 큰 데다 검사 결과에 대한 피드백도 없어서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말했다.

취준생들 사이에선 가위바위보 외의 다른 테스트에선 웃는 표정이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유튜브 등에는 ‘항상 눈웃음을 지어야 한다’, ‘안경을 벗어야 웃는 표정이 제대로 반영된다’ 등의 ‘AI 면접 팁’이 돌고 있다.

AI 역량검사를 거쳐 취업한 이보미 씨(27)는 “어려운 문제가 나오더라도 미간을 찌푸린다든지, 한숨을 쉰다든지 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입꼬리가 절대 내려가지 않도록 테스트하는 내내 표정을 관리했다. 테스트보다 표정 관리가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취준생들은 AI 테스트 장소를 마련하는 것도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기업 측에서 ‘응시에 집중할 수 있는 응시 장소가 필요하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다 보니 소음, 조명 등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서울 소재 대학 졸업예정자 손모 씨 (24)는 테스트를 앞두고 자취방 벽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와 엽서를 떼고, 화면을 더 밝게 하기 위해 책상을 방 한가운데로 옮겼다. 손 씨는 “조명이 밝아지고 배경이 깨끗해지면서 점수가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AI 역량검사를 위해 돈을 내고 스터디룸을 빌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AI 평가 업체에서 제공하는 무제한 모의고사 이용권을 구입하기도 한다. 손 씨 역시 “AI 면접 연습을 위해 24시간 동안 무제한으로 모의고사를 볼 수 있는 9900원짜리 이용권을 구매했다”고 말했다.

역량 검사 개발 업체 관계자는 "게임으로 역량검사를 하는 이유는 자극-반응에 따른 패턴을 측정해 거짓응답과 왜곡 없이 기업에서 성과를 잘 낼 수 있는 핵심 기반 역량을 측정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역량검사는 신경과학 알고리즘과 기업 고성과자 데이터 분석으로 설계된 성과역량 예측 솔루션"이라고 설명했다.

또 “영상은 기업 편의를 위해 참고용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조명 화장 발성 등이 역량검사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했다. 다른 업체 관계자는 “대면 면접과 유사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기업 대표나 인사팀장 얼굴을 학습해 만든 가상 인간을 화면에 띄우는 등 보완 작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전문가 “AI 공정성 담보 장치 필요”
AI 테스트를 활용하는 기업들은 인·적성검사 등을 치르기 위해 학교를 빌리는 등 별도의 장소를 마련하지 않고도 공채를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는다. 한 기업 인사 담당자는 “AI 검사를 도입하면 최소 3, 4단계로 진행되는 공채 절차를 효율화할 수 있다”며 “전국 각지에 있는 지원자들이 검사를 받기 위해 서울에 와야 하는 부담도 줄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는 AI가 채용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신중한 의견을 보인다. 윤지환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챗GPT 같은 생성형 AI도 학습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오답을 내거나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답변을 낼 수 있다”며 “AI가 공정성 측면에서 완벽하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과 교수는 “지금으로서는 업체 측에서 AI 테스트를 공정하게 만들었다고 하면 믿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AI 면접이 정말 공정한지 인증하는 시스템을 만들거나 충분한 검증을 거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준영 기자 hand@donga.com
김지윤 인턴기자 한국외국어대학교 스페인어과 졸업, 김윤진 인턴기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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