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규칙은 지키며 용감하게… ” 120년前 ‘협성회’ 토론회서 배울 점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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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배재학당 학생회에서 시작, 설립 초기부터 토론 규칙 정비 심혈
‘입론-반론-설득’ 절차 속 여론 형성… 교내 활동 넘어 사회 문제까지 참여
회원 다수 만민공동회 진출해 활약

만민공동회의 토론회 기록화(위쪽 사진). 만민공동회는 토론을 통한 여론 형성과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했다.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 1896년 교내에 토론단체 협성회가 설립됐다. 아래쪽 사진은 서울 중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경. 동북아역사넷·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만민공동회의 토론회 기록화(위쪽 사진). 만민공동회는 토론을 통한 여론 형성과 의회 설립 운동을 주도했다.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으로 1896년 교내에 토론단체 협성회가 설립됐다. 아래쪽 사진은 서울 중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전경. 동북아역사넷·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내년 3월 9일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최근 각 정당은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투표를 앞두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토론회를 지켜보면 실망이 큽니다. 토론의 기본이 잘 지켜지지 않는 데다 많은 시간을 다른 후보의 약점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협성회가 진행한 토론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 배재학당 학생회로 시작한 협성회
협성회는 1896년 11월 배재학당 내에 설립된 학생자치단체였습니다. 오늘날 학교마다 있는 학생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협성회의 회원은 13명이었으며 모두 배재학당의 학생이었습니다. 협성회를 지도한 인물은 서재필과 윤치호입니다. 두 인물은 모두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고, 유학 중 여러 토론회와 연설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학교 설립, 신문 발행, 연설회와 토론회의 개최 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협성회는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며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연설과 토론은 모두 민중을 모아 놓고 일상적인 언어로 계몽이념을 전파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연설은 일방적이라는 한계가 있고, 토론은 학습과 훈련이 안 되면 진행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협성회가 주최하는 토론회가 성공을 거두려면 토론에 필요한 규칙을 잘 만들고, 그 규칙에 따라 학습과 훈련이 잘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협성회는 설립 초기 약 6개월 동안 회원이 지켜야 할 회칙과 토론 규칙을 정비했습니다. 특히 토론 진행을 위해 찬성 측과 반대 측 대표자를 각각 2명씩 선정하고 1개월 동안 그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토론 규칙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토론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시작한다. 둘째, 2주 전에 토론 주제와 토론자를 정하고, 1주 전에 그 내용을 회원에게 공지한다. 셋째, 토론은 찬성 팀장의 연설 10분→반대 팀장의 연설 10분→찬성 부팀장의 연설 5분→반대 부팀장의 연설 5분→찬성 팀장의 연설→반대 팀장의 연설 순서로 진행한다. 넷째, 토론의 승패는 청중의 거수로 판정한다 등이었습니다. 토론 규칙의 양측이 입론, 반론, 최종 발언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청중에게 설득하는 것이 핵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교내에서 회원을 중심으로 진행했습니다. 회원들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할 것인가?’, ‘배재학당에서 한복을 입고 다닐 것이냐 아니면 서구식 옷을 입을 것이냐’, ‘부녀자의 교육이 필요한가?’ 등의 주제를 선정하고 토론의 규칙에 따라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독립신문 영문판 기사에는 “학생들이 회의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토론을 진행하고 있으며, 자기주장을 용감하게 표현한다”라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 학교를 넘어 거리 연설과 토론회로
1897년 여름부터 진행된 토론회는 배재학당 교내를 벗어나 광화문과 종로 네거리 등 시내에서 공개적으로 열렸습니다. 교내 토론회를 통해 연설과 토론의 방법을 학습한 회원들은 길거리 연설회를 개최하고 일반 시민에게 토론회를 공개하기 시작했습니다. 1897년 12월경에는 회원 수가 200여 명으로 늘었고, 토론과 연설에 관심 있는 일반 시민에게도 ‘찬성원’의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찬성원’은 일반 시민의 자격으로 토론회에 참가해 토론의 승패를 가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회원들은 나무로 연단을 만들고 청중을 모았습니다. 협성회원이었던 윤성렬은 “학생 4명이 2명씩 편을 갈라 고함과 욕설을 주고받으며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연출하였고, 이를 보고 청중이 모이면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토론회의 주제는 교내문제 중심에서 벗어나 점차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문제와 시국과 관련된 토론 주제로는 ‘우리나라에서 쓰는 자와 말과 저울을 똑같이 해야 하는가?’, ‘20세가 된 남자는 모두 군대에 가야 하는가?’ 등이었으며, 1897년 후반기에는 20여 회에 걸쳐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 협성회 회원의 만민공동회 진출
1898년 1월부터 협성회는 ‘협성회 회보’와 ‘매일신문’을 발간하여 협성회의 활동 상황을 홍보하는 한편 만민공동회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초 독립협회 주도 세력, 협성회의 학생 세력 등이 협동하여 설립했고, 협성회 회원들은 학생과 청년을 대표해 만민공동회에 참여했습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협성회 회원의 절반 정도가 만민공동회에 진출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은 주시경, 양홍묵, 정교, 이승만 등이었습니다. 이들 중 일부는 만민공동회의 활동에만 주력하고 협성회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아 갈등이 발생했고, 이에 협성회는 4번 이상 토론회에 불참한 이승만 등의 회원을 제명하기도 했습니다.

만민공동회는 설립 초기부터 토론을 통한 여론 형성을 중요시했습니다.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 대해 찬성 측과 반대 측의 의견을 다 듣고 토론의 승패를 가리는 과정에서 여론 형성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만민공동회 역시 협성회와 같이 토론의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토론 규칙은 협성회 규칙보다 단순해 민중이 편하게 토론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토론은 대립하는 양측의 발언자들이 서로 의견과 주장을 주고받는 대화 방식이었습니다. 영국 특파원이었던 매켄지는 만민공동회의 토론 광경을 본 후 “한국인들이 공개연설에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새로운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유익했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1898년 4월 3일 만민공동회의 토론 주제는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이었고, 이후 만민공동회는 의회설립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시기의 토론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민중 수천 명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만민공동회의 토론회가 일종의 민중정치 운동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환병 고척고 교사
#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배재학당#협성회#만민공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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