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 핑계 때리고 “실업팀 보내주마” 성추행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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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로 본 스포츠지도자 가혹행위
“자세 안좋다” 금속나사 던지고… 다른 선수들 앞에서 폭행 일쑤
피해 선수들 “폭언-구타 일상화”… 외부에 사실 알리기 쉽지 않아

고등학교 육상부 코치 A 씨는 2017년 6월 경기 결과에 실망해 혼자 방에서 울고 있던 여자 선수를 찾아가 술을 마신 뒤 이 선수가 잠들자 강제로 추행했다. A 씨는 피해자가 잠에서 깨어났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추행을 지속했다. 피해 선수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간 후에도 장기간 정신과 치료를 계속 받아야 했다.

2017년 8월 전남의 한 고교 격투기 종목 선수는 훈련 도중 코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코치는 운동화를 벗어 선수의 허벅지를 10회가량 때렸다. 다른 선수들이 모두 보고 있는 자리였다. 이 선수가 얼마 전 목에 부상을 입었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찜질을 했다는 게 폭행 이유였다.

동아일보가 2017년 7월부터 올 7월까지 스포츠계 지도자들의 가혹 행위 사건 판결문 21건을 살펴본 결과 고(故) 최숙현 선수(22) 이전에도 ‘수많은 최숙현들’이 있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지도자들은 훈련을 빙자해 수시로 폭력을 휘두르고 실업팀 추천 권한 등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성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 “욕을 안 먹거나 맞지 않으면 ‘이상한 날’일 정도로 가혹 행위가 다반사였다”는 최숙현 선수 동료들의 폭로는 스포츠계 전반의 문제였다.

판결문을 보면 스케이트를 타는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선수의 얼굴에 스케이트 날을 조립하는 데 쓰는 금속 나사를 수차례 집어던지고 머리를 때리는 등 황당한 폭행 사례가 즐비했다. 2018년 한 격투기 종목의 국가대표팀 감독이 실업팀 입단을 시도하던 피해자를 자신의 차로 불러낸 뒤 “내가 너를 실업팀에 보내줄 수 있다”며 강제 추행한 사례도 있었다. 2016년 부산의 한 태권도 도장 관장은 미성년자인 도장 관원을 사무실로 불러 “따로 연습을 시켜 우수한 학생으로 키워주겠다”고 꼬드겨 강제 추행했다.

범행 이후에는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한 중학교 유도부 수석코치는 전지훈련 도중 한 선수에게 “훈련 전 나를 깨워 달라”고 유인한 뒤 강제 추행했다. 그는 재판에서 “(피해자와) 사귀는 사이였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피고가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며 징역 6년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폐쇄적이고 수직적으로 운영되던 유도부에서 피해자는 코치의 지시를 거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판단했다.

선수들이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리기 어려운 실정도 판결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코치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한 전직 테니스 선수는 관련 재판에서 “당시 폭언과 구타가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분위기였다”며 “거짓말쟁이로 몰려 보복을 당할까 봐 참고 견뎠다. 코치가 기분이 안 좋으면 운동을 더 힘들게 시키고 더 많이 때렸다”고 진술했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고질적인 스포츠계 가혹 행위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기구가 다수 생겼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게 문제다. 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적극적인 재정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소영 기자 ksy@donga.com
#스포츠지도자#가혹행위#최숙현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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