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3·1운동 당시 최초 만세 시위지는 광주교 아래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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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 광주 국제고 수석교사, 일경 체포 103명 판결문 분석

광주 남구 구동 광주공원 앞 광주교. 1919년 3월 10일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광주교 아래 큰 장터에서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동안 최초 시위지로 알려졌던 부동교는 광주교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광주 남구 구동 광주공원 앞 광주교. 1919년 3월 10일 광주 시민과 학생들은 광주교 아래 큰 장터에서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그동안 최초 시위지로 알려졌던 부동교는 광주교에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919년 광주 3·1운동 당시 최초 만세 시위지는 부동교 아래가 아니라 광주교 아래였으며 시위 및 행진 코스와 당시 발행된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제작 장소도 당초 알려진 것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노성태 광주 국제고 수석교사가 당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재판을 받은 1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다.

노 교사는 20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리는 ‘3·1혁명 100주년 학술세미나’에서 광주 3·10 만세운동 준비와 전개과정을 판결문을 통해 정리한 ‘광주 3·1운동의 재구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 103명 판결문 분석해보니

노 교사는 논문에서 광주 3·1운동은 ‘숭일의 뿌리’(1988년), ‘광주시사’(1993년), ‘양림교회 90년사’(1994년), ‘수피아 100년사’(2008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100년사’(2009년), ‘광주전남 독립운동사적지1’(2010년) 등 3·1 운동 관련 책자에 간략하게 언급돼 그 전모를 알기 어렵다고 밝혔다. 광주 3·1운동만을 다룬 논문도 없을뿐더러 이를 언급한 몇 편의 논문조차 모의 및 전개 과정, 체포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찾아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노 교사는 판결문을 통해 1919년 3월 10일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던 곳이 구동 광주공원 앞 광주교 아래 모래사장(큰 장터)이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동안 광주 3·1운동을 다룬 책자는 최초 시위지를 불로동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김복현 외 21인’에 대한 광주지법 판결문(1919년 6월 16일)을 보면 ‘내일(10일) 오후 3시 30분부터 광주 큰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내용을 알리고…’라고 쓰여 있고, ‘김복현 등 200여 명이 첫 만세를 불렀던 최초 시위지는 광주교 밑 모래사장이었다’고 기재돼 있다.

시위 군중이 행진하던 길도 당초 알려진 것과 차이가 있다. ‘광주시사’에는 작은 장터를 출발해 서문통(부동교에서 충장우체국 가는 길)에서 본정통(충장로)으로 좌회전한 뒤 충장로 파출소에서 우회전해 금남로를 지나 광주경찰서로 가는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판결문에는 서문통을 지나 본정통으로 향한 뒤 충장로4가에서 광주농교 학생 등 군중과 합세해 다시 충장로로 되돌아와 광주우편국(충장우체국)을 지나 광주경찰서까지 행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군중이 금남로로 행진한 것이 아니라 충장로를 오가면서 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3·10 만세운동 당시에 발행됐던 ‘조선독립광주신문’의 제작 장소도 달랐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회계직원인 황상호는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해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비밀리에 발간해 3월 11∼18일 배포했다. ‘광주전남 독립운동사적지1’에는 제중원 지하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돼 있지만 ‘황상호 외 2인’의 판결문에는 황상호 자택으로 기록돼 있다.

재판을 받은 인물의 이름과 형량이 다른 사례도 확인됐다. ‘광주시사’에는 김철(김복현) 정광호 범윤두 김용규 한길상 최정두 박일구 김윤호 이창호 김태열 김범수 강석봉 최병준 김강 최한영 등 15명이 3년형을 받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판결문에 따르면 김윤호는 이윤호의 오기(誤記)이며 형량도 4개월이다, 이창호는 6개월, 강석봉은 1년 6개월(1심)과 1년(2심)을 각각 선고받았다.

1919년 3월 10일 광주시민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던 서문통 광주우편국. 노성태 교사 제공
1919년 3월 10일 광주시민과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펼쳤던 서문통 광주우편국. 노성태 교사 제공
○ 청년 학생이 중심된 만세운동

노 교사는 103명의 판결문을 분석해 형량과 직업, 주거지 등을 분류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4건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김복현 외 21인’은 광주 3·1운동을 모의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인쇄한 후 시위 군중을 주도했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가 적용돼 3년에서 1년 6개월의 형이 선고됐다. ‘박애순 외 76인’은 독립선언서 등을 학생 및 시위 군중에게 배포하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에서 4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다수가 숭일·수피아·농업학교 학생들이었다. ‘조선독립광주신문’ 1∼3호를 제작, 배포한 혐의(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로 재판을 받은 ‘황상호 외 2인’에게는 3년에서 2년 6개월이 선고됐고 4월 8일 자혜병원 앞 만세시위를 주도한 광주보통학교 4학년 최영섭은 1년형(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재판을 받은 103명 중 최연소자는 수피아여학교 학생 강화선(당시 16세)이었으며 최고령자는 두 아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한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 출신 이주상(당시 52세)이었다. 10대와 20대가 89명으로 전체 86.4%를 차지해 광주 만세운동이 학생과 청년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학생 53명 가운데 숭일학교가 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수피아학교 20명, 농업학교 6명, 대학생 2명, 보통학교 1명 등이었다.

재판을 받은 이들의 직업도 다양하다. 농민, 교사, 학생, 병원 근무자뿐 아니라 석유장수, 안마사, 대장장이, 신발가게 운영, 이발사, 수공업 제품을 만드는 장인까지 각계각층이 참여했다. 거주지를 살펴보면 광주군 효천면과 광주면 출신이 84명으로, 81.6%를 차지한다. 이는 양림동과 광주읍성 및 광주천 주변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3명 중 60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으며 43명은 직계 가족이 없거나 자료 미비, 사회주의 활동 등으로 서훈을 받지 못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3·1운동#광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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