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날 줄 누구나 알만한 상황서 화재 직접원인 돼야 ‘중실화’ 처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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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유소 화재’ 스리랑카인 처벌될까

경찰이 풍등을 날렸다가 고양저유소 화재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스리랑카인 A 씨(27)에게 중실화 혐의를 적용한 것에 대해 논란이 뜨겁다. A 씨의 행위를 범죄로 처벌할 수 있는지가 논란의 핵심이다.

본보는 2014년부터 올해 9월까지 실화 또는 중실화 관련 법원 판결 21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사전에 화재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었는지, 실수 행위가 화재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것이 명백한지가 유무죄를 가르는 기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화재 가능성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었다면 중실화 혐의로 가중 처벌됐다.

○ 예상 가능하고 화재의 직접적 원인돼야 처벌

실수로 불을 냈다고 무조건 처벌되는 것은 아니다. 올 6월 수원지법 평택지원은 경기 평택시의 한 플라스틱 공장 건물을 태운 혐의를 받은 이모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이 씨가 공장 근처에 버린 잿더미에서 불씨가 날려 화재로 이어졌다며 실화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공장 내 전기 문제로 불이 났을 수 있어 이 씨의 과실이 화재 원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판시했다. 실수 행위가 화재의 직접적 원인이 아닐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처벌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반면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은 잡초를 태우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불씨가 날려 공동묘지 일부를 태운 신모 씨에 대해 지난달 실화 혐의로 30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화재 위험이 큰 건조한 날씨에 아무 예방조치 없이 잡초에 불을 붙였다”며 신 씨의 책임이 크다고 판단했다. 화재 위험을 예상할 수 있는데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인정한 것이다.

누가 봐도 화재 위험이 큰 상황에서 고의에 가까운 수준의 실수로 불을 냈을 때에는 실화(1500만 원 이하의 벌금)보다 처벌이 무거운 중실화(3년 이하 금고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 혐의를 적용했다.

침대 아래쪽에 모기향을 피웠다가 고시원 건물 전체를 태운 심모 씨는 2014년 12월 대법원에서 중실화 등 혐의로 금고 1년 4개월형이 확정됐다. 법원은 “좁은 방안에서 창문을 열거나 이불을 펼 때 침대 밑에 있던 먼지가 묻은 휴지나 비닐, 톱밥 등이 바람에 날려 모기향 주변으로 옮겨질 수 있다”며 유죄를 인정했다.

하지만 빌라 주차장에 있던 종이컵에 담배꽁초를 버렸다가 우연히 인화성 물질에 닿는 바람에 건물 전체를 태운 오모 씨에게는 지난해 10월 인천지법 부천지원에서 실화 혐의로 800만 원의 벌금형이 선고됐다. 검찰은 중실화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주변에 인화성 물질이 있다고 알리는 경고판 등이 없었다”며 실화 혐의만 인정했다.

○ 잔디에 떨어진 풍등… 실화 혐의 판단에 변수

A 씨의 경우 실화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유무죄를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법조계의 시각이다. 먼저 풍등의 불씨가 저장탱크 화재로 이어졌다는 점을 입증하는 게 만만치 않다.

풍등이 잔디에 먼저 떨어진 뒤 잔디의 불이 저장탱크 유증환기구를 통해 옮겨붙은 점도 변수가 될 수 있다. 불이 난 곳과 분리될 수 있는 시설물에 불이 붙은 경우 실화가 아니라는 판결이 있다. 대법원은 9월 셋방에서 번개탄을 피워 장판을 태운 박모 씨에 대해 “문틀이나 벽 등 건물 자체에 불이 붙었을 때 (건물에 대한) 실화죄가 성립한다”는 취지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저유소를 관리하는 대한송유관공사의 관리 부실이 확인될 경우 공사 관계자들에게 실화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서울고법의 한 판사는 “공사 관계자가 불씨를 제공한 게 아니라면 실화가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부산지법의 한 판사는 “공동의 과실이 합쳐져 불이 난 경우 원인을 제공한 각자에게 실화죄를 물은 대법원 판례가 있다”며 “A 씨와 공사 관계자를 실화의 공범으로 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고도예 기자 yea@donga.com
#저유소 화재#스리랑카인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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