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피플 in 뉴스]신고리 원전의 운명과 존 밀턴이 그린 ‘낙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18일 03시 00분


코멘트
2009년 개교 800주년을 맞은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졸업생 존 밀턴의 얼굴을 프로젝터로 형상화하고 있다. 텔레그래프 제공
2009년 개교 800주년을 맞은 영국 케임브리지대가 졸업생 존 밀턴의 얼굴을 프로젝터로 형상화하고 있다. 텔레그래프 제공
17세기 영국의 왕정복고를 반대하며 자유를 갈망한 공화주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원죄와 구원 가능성을 그린 장편 서사시 ‘실낙원(Paradise Lost·1667)’의 작가 존 밀턴(1608∼1674)입니다.

“진리의 오묘함을 보라. 진리는 특정한 논리나 사고의 방법에 묶여 있을 때보다 자유롭고 자율적일 때 더 빨리 자신을 드러낸다. (중략) 진리와 허위가 맞붙어 논쟁하게 하라. 누가 자유롭고 공개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불리하게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진리를 향한 논박이 허위를 억제하는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이다.”

당시 출판물에 대한 통제를 위해 선포된 영국 왕실의 면허령에 반대하기 위한 존 밀턴의 반박문 ‘아레오파지티카’(1644)에 나오는 명문입니다. 이로 인해 밀턴은 언론 자유의 선구자로 불립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살아온 경험과 가치관,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찬성과 반대 의견으로 나눠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위해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요. 다수결의 원칙은 차선이지 최선은 아닙니다. 다수의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최고 통치자의 결단에 의지하는 것도 오류와 독단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직접민주정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간접민주정치(대의제)는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 루소가 예견했듯 일반의지를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대표자들을 우리가 직접 뽑는다 해도 그들이 우리의 의사를 제대로 대변한다는 보장이 없으며 그들의 의사결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론 조사 역시 신뢰도의 문제를 늘 떨치기 어렵습니다.

대의제의 대안이 될 만한 여러 제도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라는 말이 자주 거론됩니다.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는 가운데 자유로운 토론과 의견 개진을 통해 깊이 생각하여 결정하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의사 결정 방식입니다. 시민 토론, 전문가 토론 등 다양한 방식의 격론 과정을 거친 후 다수결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단순 다수결과는 다릅니다.

원전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놓고 공론 투표에 참여하는 시민참여단 471명이 14일 종합토론을 마치고 최종 투표를 마쳤습니다. 원전의 안전성, 환경성, 경제성 등을 놓고 3개월 동안 시민참여단, 전문가, 지역 주민들이 공론 과정에 참여했습니다. 결과는 이달 20일이면 발표됩니다. 대통령은 그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성숙한 시민 의식과 민주적 태도입니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결론이 도출되었다고 해서 불복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개방적 태도가 요구됩니다. 제한된 경험과 정보만으로는 태양이 지구를 돈다 해도 믿었겠지요. 그러니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 역사와 과학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에너지 정책의 향방을 가를 중요한 공론 투표의 결과가 나오기 직전, 존 밀턴이 떠오릅니다. 정보의 왜곡됨 없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소통하는 가운데 진실이 드러나는 세상이야말로 우리의 낙원(樂園)이 아닐까요.
 
박인호 용인한국외대부고 교사
#신고리 원전#존 밀턴#실낙원#숙의민주주의#성숙한 시민의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