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치매 독거남 구한 ‘빨간 우체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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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구, 생계지원 사업 성과
“어려움 겪는 이웃 도움 요청을”… 주민들에 안내문-편지지 배포
복지 사각지대 60여명 혜택 받아

올 2월 한 50대 남성이 ‘빨간 우체통’을 통해 서울 영등포구에 보낸 편지. 사고로 무릎을 다친 뒤 오랜 기간 실직 상태에서 어려움을 겪던 이 남성은 영등포구의 도움으로 같은 달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갖게 됐다. 영등포구 제공
올 2월 한 50대 남성이 ‘빨간 우체통’을 통해 서울 영등포구에 보낸 편지. 사고로 무릎을 다친 뒤 오랜 기간 실직 상태에서 어려움을 겪던 이 남성은 영등포구의 도움으로 같은 달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갖게 됐다. 영등포구 제공
“이제 겨우 60대인데 도움을 받아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밤낮으로 통증이 너무 심해서….”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해 12월 서울 영등포구 당산1동 주민센터에 한 남성이 찾아왔다. 키 160cm 정도에 왜소한 남성의 얼굴과 손등에는 주름살이 깊게 패어 있었다. 80대 노인처럼 흰머리가 수두룩했고 군데군데 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센터 안을 서성이던 남성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대뜸 직원에게 건넸다.

남성이 가지고 온 종이는 며칠 전 영등포구가 관내 주민들에게 배포한 안내문이었다. ‘소중한 당신께’란 제목의 인쇄물에는 ‘경제적 사정으로 생계 또는 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이웃이 있다면 도움을 요청해 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안내문 바로 밑에 인적사항과 사연을 기록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남성이 건넨 종이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발끝만 쳐다보며 한참을 망설이던 남성은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면서 “간단한 병원 진료만이라도 부탁한다”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조회 결과 주름이 가득한 백발 남성의 나이는 ‘겨우’ 64세. 주민센터에 가면 생계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는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주민센터 직원이 가본 그의 숙소는 화장실도 없는 허름한 여인숙 단칸방이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방안에 온기는 전혀 없었고 식사를 한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밀린 방세는 100만 원이 넘었다. 근처 청과시장에서 멍이 든 과일을 사다 팔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왔지만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 두통이 반복됐지만 주변 사람과 교류가 전혀 없었던 남성은 홀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방에는 5년 전 처방받은 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민센터의 도움으로 몇 년 만에 병원을 찾은 남성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의사는 그에게 치매 진단을 내렸다.

남성은 2월부터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으로 각종 지원을 받게 됐다. 그가 들고 온 안내문이 그를 살린 셈이다. 이 안내문은 영등포구의 ‘빨간 우체통 사업’을 통해 주민들 손에 들어갔다. 영등포구는 지난해 말 관내 지역주민들에게 생계지원 안내문과 편지지를 배포했다.

생계에 도움이 필요할 경우 사연과 인적사항을 적어 가까운 우체통에 넣으면 사실을 확인한 뒤 적절한 도움을 주는 방식이다. 어려운 형편 탓에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그는 자신의 인적사항을 적지 못했다. 우체통에 넣지 못하고 주민센터로 바로 가져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빨간 우체통 사업이 시작된 후 복지 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는 주민들의 숨은 사연이 수면 위로 하나씩 드러났다. 영등포구에 따르면 주민 60여 명이 생계지원을 요청했다. 도움을 청한 상당수는 주변과 별다른 접촉 없이 혼자 사는 50, 60대 1인 가구였다. 대부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은 충족했지만 주변 교류가 없는 데다 개인 사정을 드러내기를 꺼려 장기간 방치돼 온 것으로 구는 분석했다.

박옥란 영등포구 복지정책과 팀장은 “가족 없이 반지하방에서 혼자 살고 계신 분들이 대다수였다”면서 “빨간 우체통을 통해 속마음을 털어놓는 주민들이 늘고 있는 만큼 앞으로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강승현 기자 byhu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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