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대인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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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대인배…쾌유 빌어요.’ 올 3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주최 조찬강연회에서 테러를 당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의 쾌유를 빌며 누리꾼들이 보낸 응원 메시지 중 하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장에서 노 전 대통령의 아들로부터 ‘진정 대인배의 풍모’라는 비아냥거림을 듣기도 했다. 두 경우의 ‘대인배(大人輩)’는 그 뜻이 전혀 다르다. 어찌됐든 최근 몇 년 새 대인배를 입에 올리는 이가 많아졌다. 마음 씀씀이나 아량이 넓은 사람을 나이에 상관없이 대인배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대인배라는 이 신조어, 들을수록 이상하다. 사람들은 흔히 ‘마음 씀씀이가 좁고 간사한 사람들이나 그 무리’를 소인배(小人輩)라고 부른다. 그러다 보니 그 반대를 대인배라고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과연 그럴까. 소인배와 대인배에 붙은 ‘배(輩)’의 쓰임새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을 뜻하는 소인과 결합한 배는 자연스럽지만, 대인과 배는 어울리지 않는다.

필자는 한자말을 쓸 땐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써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다. 배도 그중 하나다. 배는 ‘무리를 이룬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모리배(謀利輩)를 비롯해 불량배 폭력배 간신배 정상배 시정잡배 등 배가 붙은 말은 대개가 부정적이다. ‘말과 행실이 바르고 점잖으며 덕이 높은 사람’을 일컫는 대인의 뒤에 주로 나쁜 사람을 뜻하는 배를 갖다 붙이는 것은 어색하다.

혹여 ‘정면교사(正面敎師)’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부정적인 대상을 통해 교훈을 얻다’라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널리 쓰이자 ‘모범사례를 통해 교훈을 얻다’는 의미로 잠깐 등장했던 말이다. 허나 이 말은 반면교사에 대응하는 조어(造語)에 머물다 이내 언중의 입길에서 사라져 버렸다. 말의 시장에서 무엇이 살아남느냐는 언중의 말 씀씀이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다행히 대인배는 아직 입말로 굳어지진 않았다. 이는 다른 좋은 말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를 대신할 좋은 표현이 없을까. 됨됨이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큰사람’이나 ‘마음부자’는 어떨까. 마뜩잖으면, 그냥 ‘대인’이라고 하면 된다. 말법에도 맞지 않고 말맛도 그저 그런 대인배보다는 훨씬 낫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대인배#정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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