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이 아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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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태풍으로 백록담 북벽 무너져… 원형 분화구, 한쪽 터진 말발굽형 우려
매년 등산객 100만명 넘게 찾아… 일부 흡연-술판에 쓰레기 마구 버려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분화구의 북벽(점선 안)이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다. 한라산이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와 각종 자연재해, 안전사고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위쪽 사진) 물어지고 있는 한라산 정상 북벽 외부 모습.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 분화구의 북벽(점선 안)이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다. 한라산이 등산객들이 버린 쓰레기와 각종 자연재해, 안전사고 등으로 신음하고 있다.(위쪽 사진) 물어지고 있는 한라산 정상 북벽 외부 모습.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벚나무의 일종인 산개벚나무가 꽃을 활짝 피웠고 바닥에는 가녀린 세바람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었다. 수레바퀴처럼 생긴 설앵초 꽃은 보랏빛이 한창이고 섬매발톱나무는 날카로운 가시 사이로 노란 꽃망울을 터뜨렸다. 기후변화 등으로 고사목이 대량으로 발생한 구상나무는 생명을 퍼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제주 도심은 여름을 향해 달려가는데 17일 찾은 한라산 고지대는 이제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라산 정상에 봄이 찾아왔지만 곳곳에 생채기가 드러나 있었다. 관음사 코스 삼각봉 휴게소(해발 1620m)를 지나자 펜스가 엿가락처럼 휘어진 모습이 들어왔다. 산사태, 낙석 등으로부터 등산객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펜스가 겨울에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 때문에 대형 참사가 벌어질 뻔했다. 19일 커다란 바위가 등산로를 덮쳤다. 한라산국립공원 측은 곧바로 삼각봉 휴게소에서 정상까지 2.5km 구간의 출입을 금지했다.

균열과 산사태는 한라산 모습마저 바꿔놓고 있다. 백록담 북벽은 폭우, 태풍 등이 몰아칠 때마다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다. 원형의 분화구 모양이 머지않아 한쪽이 터진 말발굽형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등산객에 의한 상처도 만만치 않다. 정상 덱 아래에는 등산객이 몰래 버린 페트병, 일회용 도시락 용기 등이 가득했다. 백록담 분화구 주변 출입을 통제했지만 이를 무시하는 등산객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성판악 코스로 하산하는 길. 진달래밭 대피소에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 목격됐다. 등산객이 몰래 버린 도시락 쓰레기가 군데군데 보였고 일부 등산객은 공원 직원의 단속을 피해 몰래 담배를 피웠다. 지난해 85명에 이어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21명이 흡연하다 단속에 적발됐다. 한라산 5개 등산코스 가운데 등산객 36%가량이 몰리는 성판악 코스는 주말마다 주차 전쟁이 벌어진다.

한라산을 처음 찾은 한 한국계 미국인(38·학원강사)은 “단조로운 코스이기는 하지만 분화구, 자생식물, 기암괴석 등이 특별했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선정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면서도 “하지만 등산객들이 정상에서 술을 마시고,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모습을 보면서 다소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한라산은 중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파키스탄 등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고 있다.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 유네스코(UNESCO) 자연과학 분야 3관왕의 핵심 지역인 한라산을 직접 체험해 보기 위해서다.

등산객은 2010년 114만 명으로 처음 100만 명을 돌파한 이후 2012년 113만 명, 2013년 120만 명, 2014년 116만 명을 기록했다. 강시철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장은 “한라산은 한국의 보물이다. 아끼고 보듬어야 하는데 등산 에티켓은 수준 이하다. 무리한 산행으로 몸을 망치는 사례도 많다. 중국의 황산(黃山) 산처럼 세계인이 즐겨 찾을 수 있는 명산이 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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